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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Nov 02. 2023

면접관 아빠, 면접자 남자친구

월간 지음지기: 11월 "동네 한 바퀴, 압구정"

  어느 봄날, 사랑하는 두 남자와의 독대 생각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생의 가장 큰 선물을 나라고 고백한 우리 아빠와 생의 가장 멋진 일로 나와의 만남을 꼽은 남자친구가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저녁식사를 하다니!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유형의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셋이 그렇게 만난 시점이 그저 우연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시기가 절묘했다. 



  삼자대면이 있기 삼일 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뵈러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갔었다. ‘결혼을 한다면 이 친구랑 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기에, 말로만 듣던 그의 목포 생활과 부모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나고 경험해 보고 싶어 감행한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평소 하루 일과를 전화 통화로 나누는데 익숙한 우리 아빠는 나의 목포 여행 일정을 전해 듣더니 ‘어라, 우리 딸이 남자친구만 만나는 줄 알았더니, 이젠 그 부모님까지 뵈러 가네?’ 하는 위기감(?) 같은 게 들었나 보다. 


  아마도 아빠라면 이랬겠지. 앞으로 본격적인 혼담이 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어느 날 목포를 덜컥 방문한 것처럼 남자친구가 대구로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겠다고 예상을 했겠지. 그래서 남자친구가 엄마 앞에 등장하기 전, 본인이 직접 나서서 예비 면접 같은 걸 치러보고 싶었겠지. 아빠는 주도면밀한 계획자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목포 여행과 아빠의 마음. 삼자대면에 불이 붙기엔 충분한 요인들이었다. 


  ‘아버지 뭐 하시노?’ 같은 영화 대사를 주고받을지도 모르는 저녁 식사 자리. 나는 아빠와 남자친구 사이에서 채팅방을 이쪽저쪽 오가며 식사 일시를 확정 지었다. 산 하나를 넘었다 생각했는데 곧이어 또 다른 고민이 등장했다. 식사 장소를 어디로 하면 좋을까? 기왕이면 내가 사랑하는 두 남자가 서로를 편히 알아갈 수 있는 장소, 너무 시끄럽지 않고 너무 비싸지도 않은 곳, 음식이 맛있어서 혹시 모를 어색한 분위기를 시식평으로 조금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곳, 식사를 마치고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카페가 근처에 있는 곳, 그리고 그 모든 일정을 마쳤을 때 집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 곳… 부모님과 연인을 모이게 하는 자리는 장소 선정부터 쉬운 게 하나 없었다.



  SNS에 소개되는 풍경과 달리 내가 직접 경험하고 살아본 압구정은 오래되고 허름한 분위기의 식당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동네다. 그중엔 음식 내공과 자영업의 역사를 함께 쌓아온 터줏대감들이 많은데, 기본적으로 한 자리에서 10년 넘게 장사를 이어온 가게들이 대부분이다. 그 터줏대감들 중에서 장소를 고른다면, 아빠의 토속적인 입맛을 맞추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약속 일시가 아직 꽃샘추위의 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봄날이란 걸 고려하여 뜨끈한 국물이 있는 곳들을 위주로 찾아보기로 했다. 


  고민과 검색 끝에 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와 남자친구에게 그곳의 주소를 전달하자 다들 좋다고 했다. 압구정역 5번 또는 6번 출구로 나와 가로수길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에 광림교회 근처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무려 1997년도부터 영업을 해 온 '압구정 샤브샤브'였다.


  가게는 2층에 위치해 있었고, 내부 인테리어가 모던하진 않지만 정겨움이 가득 묻어 나오는 분위기를 풍겼다. 딩동 하는 출입 알림음에 앞치마 차림의 점원들이 달려 나오는 곳이었고 푹신한 소파 주변을 메운 식탁 위에 1인 인덕션이 여럿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부추를 송송 썰어 넣은 특제 간장 양념과 간이 시원한 서울김치와 무 냉채가 소담히 담겨 나오는데, 이 또한 인당 하나씩 제공해 주어서 식사 풍경이 그렇지 않은 식당에 비해 깔끔한 것이 특징이었다. 채소 구성이 다양한 것은 물론, 추가 요금을 얹어 샤부샤부 마지막에 즐기는 죽 요리에는 명란이 알알이 섞여 들어가 푸짐한 식사 마지막에 감칠맛을 더했다.

 

  샤부샤부 집을 아빠의 면접장으로 선정된 배경에는 가게가 고집하는 샤부샤부 1인 체제의 공이 컸다. 각자 원하는 샤부샤부 메뉴를 시켜 식탁에 설치된 1인 인덕션을 이용해 제 마음대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으니, 처음 보는 사이에는 한 뚝배기, 한 냄비를 공유하는 불편함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샤부샤부 1인 체제는 또 계속해서 활동 거리와 대화 거리를 만들기에 적합했다. 냄비 물을 끓이고, 준비된 신선 재료를 양껏 익히고 건져내고, 국자를 휘젓고 또다시 요리를 시작하고, … 혹 면접 아닌 면접 중에 잠깐 침묵이 있거나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되려 하면 요리에 집중하거나 앞에 놓인 솥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할 수 있었다. 



  


  삼자대면을 위한 모든 게 세팅되자 문득 생각이 났다. ‘난 면접 잘 봐. 늘!’ 하던 남자친구의 말이었다. 자기소개서 작성 때부터 마치 이 회사가 나를 뽑아주기 만을 기다렸다는 듯 운명론적 소설을 써나가는 문과생(나)의 면접 중엔 무례한 질문과 엉뚱한 질문이 난무했는데, 어째서 남자친구는 면접을 잘 본다고, 잘 볼 수밖에 없다고 자부하는지 의문이 갔다. (남자친구는 이직이 잦은 본인의 업계(개발자 커뮤니티)에선 자신이 원하는 바와 회사가 원하는 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과 회사가 계획하는 일 간의 싱크를 맞추는 방식으로 면접이 진행되기 때문에 면접이 어려울 수가 없다는 설명이 뒤따라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있는 그대로 아버지가 묻는 말에 답하고, 진심으로 나를 보여드리면 되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아버지잖아.”


  오. 대단한 샤부샤부 가게를 장소로 섭외한 것도 모자라, 아주 대단한 면접자를 모신 기분이 들었다. 면접자는 준비 만반이란 생각이 들자, 면접관이 될 아빠에게로 마음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런데 그 마저도 금방 안심이 되었다. ‘나의 아빠라면 남자친구에게 절대 무례하게 굴지 않을 거라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을 부드럽게 물어볼 거라고, 이따금 분위기를 유하게 하고 싶어 농담을 섞을 거라고, 기왕이면 웃을 거라고.’ 단번에 확신이 들었다. 그간 쌓아온 부녀 간의 믿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압구정 샤부샤부에서의 면접은 어땠냐고? 남자친구와 나는 부부가 되었고 최근 결혼기념일 1주년을 지냈다. 아빠는 남편이 하는 말이 맘에 들기라도 하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마음을 한껏 내주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이 삼자대면을 성사시킨 그때와 같은 계절은 아니지만, 추위가 더위를 누르고 발 밑에 떨어질 낙엽과 쌓일 눈을 기대하기 시작하는 계절이니 뜨끈한 샤부샤부 국물을 한번 끓여내는 외식 나들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번엔 엄마까지 다 같이, 넷이서 방문하고 싶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ㄷ(디귿)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동네 한 바퀴, 압구정"에 관한 또 다른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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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로데오 거리> / 최정연: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244015833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지음지기 포트폴리오: writtenndrawnby.notion.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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