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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Jan 24. 2024

용기는 거리에 있어

슈투트가르트,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여행이 다채롭진 않을 거야.'

마음이 닫힌 채 여행길에 나서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포르셰, 벤츠, 보슈(Bosch) 사의 본사가 있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흥미가 가지 않았고, 당일치기 여행이라 도시와 친해질 기회가 단 몇 시간이기도 했다. 붉고 푸른 크리스마스 조명 외에는 회색빛이 가득했던 겨울날, 부지런한 일정 대신에 구도심지 쪽으로 잠깐 걷다 오자는 계획을 세웠다.

세계대전으로 슈투트가르트가 폐허가 되자, 새로운 도시 계획이 필요했다. 이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보단 새 시대에 알맞은 건물을 세우기로 했다는데, 전후 취임한 아눌프 클래트(Arnulf Klett) 시장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아눌프 시장이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주의를 받아들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도시 풍경을 완성했다(네이버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그래서일까, 구도심지로 걷고 있어도 '구'라고 불릴 만한 풍경이 눈에 띄진 않았다. 독일 구도심지의 특징으로는 아무래도 짙은 밤색의 나무판자가 돋보이는 팍베어크하우스(Fackwerkhaus; 목골조 건물)가 떠오르는데, 크게 이국적이지 않은 거리의 연속이었다.

'이럴 거면 벤츠 박물관에라도 갈 걸 그랬나.'

기차 시간을 살피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겠다며 뒤돌아섰다. 방금 전까지 현장학습을 나온 듯한 독일 어린이들이 모여 있던 자리가 휑하다. 없었던 빈 공간을 목격한 뒤로 도시 전체가 뿜어내는 회색빛이 더 진해 보인다. 괜히 추워졌다. 터덜터덜. 그런데 저 멀리 회색빛이 아닌 무언가를 뿜어내는 듯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보도블록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화가는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고 작품 마무리 단계에 다다른 듯 보였다. 기타 가방을 열어두고서 공연을 펼치는 지하철 역의 버스커처럼 화가는 자신의 작업실과 작업 방식, 재료 등 가능한 한 모든 걸 공개하며 일종의 쇼를 벌이고 있었다.

'용기가 대단한 걸.'

일기장에 적은 문장 하나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노트를 에워싸다시피 웅크려 글을 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애정을 담아 쓴 문장이 누군가에게 가 닿지 못하거나  합평이란 이름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할 때가 생각났다. 그때마다 주로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며 독자에게 화를 내거나, '역시 이래선 안 되는 건가, '하며 나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었다.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글을 쓰고 공개하고 관련 작업 공정과 고민을 나누는 게 더 힘들어졌다. 문장이 무거워만지고 쓰기가 즐겁지 않기도 했다.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인 채색 도구들과 초상화 밑에 놓인 팁 박스, 편안하지만 한껏 몰입한 표정, '뭐 어떠냐, 보아라!' 하는 듯한 몸짓까지... 거리의 화가는 달라 보였다. 자유로워 보였다. 용기가 생기는 상황은 회색빛 도시에서 다른 빛깔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뜬금없었다.

'일기장에 있던 걸 조금 다듬어 꺼내볼 순 없을까?'

스멀스멀, 오래 붙잡아둔 생각이 커졌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일단 다시 움직이다 보면. 팁 박스 옆에 적힌 문구가 어깨동무를 해왔다.

"(팁 줄) 잔돈이 없다면, (당신의) 작은 웃음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겁니다. Wenn Sie kein Kleingeld haben, freu(e) ich mich auch über ein kleines Lächeln."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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