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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04. 2020

36.오늘의 참치 요리 하나, 혁명 정신은 빼고 주세요

ESSEC 비즈니스 스쿨 겨울 계절학기 노트(3)

17.01.03 화요일


라데팡스의 1월 아침 풍경

라데팡스에서의 등굣길 풍경. 아침 하늘이 어쩜 저런 색을 띠고 있었을까. 당시 파리의 분위기와는 달리 너무나 평온한 색깔이다.


17년 1월의 파리는 기차에 오르고 내릴 때부터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언제 어디에서 테러가 일어날지 몰랐고, 강의실이 위치한 CNIT 건물과 같은 큰 건물들과 역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테러의 위협 중에도 일상은 흘러갔고, 수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위협을 무찌르는 가장 큰 원동력이 어쩌면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일상의 수레바퀴 같은 것은 아닐지 되묻게 된다.




마망 교수님과의 이틀 차 수업을 마치고 라데팡스 역에서 ESSEC 세르지 캠퍼스로 복수학위 과정을 밟으려 온 G와 Y를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잠깐 시간이 나서 라데팡스 캠퍼스 한쪽에서 CNIT 쇼핑몰을 내려다보며 시험공부를 이어갔다. 연말의 분주함과는 또 다른 분주함이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드러났다. 무언가를 끝내려는 움직임과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주는 힘은 무언가 다르다. 전자가 설렘과 여유로 가득하다면 후자는 조금은 조급해하고 서두르는 것 같다. 이제 막 시작한 나머지 잘해보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일까.



CNIT 쇼핑몰이 내려다 보이는 이 곳이 5일간 나의 최애 공부 장소가 되었다 :)



G와 Y를 만나자 우리는 바스티유(Bastille) 역으로 향했다. 파리에 온 지 3일 만에 중심으로 여행을 떠난 셈이다. 무언가 거창한 걸 하기 위해선 아니고, 그저 밥 한 끼 먹자고 만난 우리들이었다. 1789년, 혁명 정신으로 가득 메워졌을 바스티유 광장은 이전에 빅토르 위고 생가를 위해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고, 친구와 걷다 걷다가 자그마한 샵들과 빵집들에 이끌려 산책을 감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리와 인연이 깊은 G가 나를 데려간 곳은 혁명 정신이 가득한 곳이 아닌 그저 자그마한 카페와 바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골목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고양이 카페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동물 인권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나라보다 더 오래, 더 활발히 이뤄지는 유럽에서 고양이 카페를 발견할 줄이야!), 멀리서 봐도 캣타워를 힘겹게 오르내리는 뚱냥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는 Cafe de l'industrie로 들어갔고, 나는 거침없이 '오늘의 요리(plat du jour)'라 적혀 있는 '참치(tong)' 요리(11유로)와 화이트 와인 한 잔(3.5유로)을 주문했다. 음식과 와인이 차려지고 ESSEC과 뤼벤대학교에서의 일상을 공유하다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우리들의 저녁 메뉴: Y가 시킨 메뉴가 '참기름만 없었지 영락없는 육회'여서 깜짝 놀랐다. 노른자까지 완벽하게도(왼쪽)! / 파리에서 보기 드문 고양이 카페의 간판(오른쪽)



배불리 먹고 RER을 타러 가는 길, 자정까지 문을 여는 슈퍼 franprix의 풍경에 깜짝 놀랐다. 뤼벤은 매우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는 곳이다. 저녁 6시 이후의 시간을 주로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게, 대부분의 상점들이 6시에 문을 닫고, 그나마 늦게까지 여는 곳은 8시까지 운영하는 대형 슈퍼마켓들 뿐이다. 야식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는 건 생각도 못한다 (유럽의 편의점은 우리나라의 편의점과는 달리 뭔가 모르게 담배 가게(feat. 감자칩) 느낌이 강하다.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관광지이자 프랑스의 수도인 이곳 파리에서는 '나이트 라이프'가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은 살아 있는 듯했다. 자정까지 운영하는 슈퍼라니... 훌륭하다 정말. (훌륭하다고 칭찬한 김에, franprix에서 초콜릿 하나를 사서 나와버렸다.)


라데팡스 역에서 아파트까지 걷는 길이 어두웠지만 씩씩히 걸어 들어갔다. 마망 교수님과의 수업이 내일 부로 3일째에 접어들게 된다.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17년도 1월에 파리를 찾았을 땐 분명 테러의 위협이 유럽 곳곳에 있었다. 그런데 떡 하니 외식을 하러 간 일기를 발견하니 조금은 당황스럽다. 당시의 나는 무슨 생각이었나. 알게 모르게 안전 불감증과 테러 소식에 익숙해진 마음 등이 컸던 걸까. 테러의 위협이든 전염병의 위협이든, 그 위협이 오래도록 지속될 때, 위협이 점점 더 무뎌져 가는 마음이 가장 무섭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어떤 위협이 있든지 간에 '나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 혁명 정신을 쏙 빼고 고양이 카페가 들어서 있던 파리의 골목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안타깝게도 긴 추석 연휴를 끝마쳐야 하는 지금을 되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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