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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Feb 01. 2024

장바구니를 든 독일어

마인츠, 독일

'독일 사람들은 무엇으로 식탁을 차리고 허기를 달래는가. 어떤 식습관을 갖고 있는가.' 위 질문에 대한 답과 더불어 음식과 관련 있는 생활상을 알아가기에는 '장보기(Einkauf)'만 한 활동이 없다. 자취 경력이 없던 사람이더라도, 삼시 세끼를 외식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으냐고 떵떵거렸더라도, 피할 수 없는 활동이기도 하다.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유학 와 있는 동안 독일과 좀 더 친해지고 싶다면, 그들의 문화가 질서 정연하게 분류, 진열되어 있는 슈퍼마켓으로 가는 것만큼 멋진 학습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슈퍼마켓은 독일어 초보자가 배운 것을 활용해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초급 독일어 수업을 들은 사람이라면 알 거다. 독일어의 기본 뼈대가 되는 발음과 특징을 익히고, 이름과 국적, 취미로 이루어진 엉성한 자기소개를 할 수 있게 되면, 교과서의 3과 혹은 4과 즈음에 슈퍼마켓이라는 장소가 등장하는 것을! 해당 과는 독일어로 숫자를 읽고 듣고 말하는 것을 연습하고, 생필품과 관련된 어휘를 하나씩 외운 다음에 '장보기 상황극'을 멋지게 소화해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알찬 구성인데 유학 생활 중에 활용도도 높은 과다.

의식했든 그렇지 못했든 슈퍼마켓을 누비면서 우리 모두는 'Milchprodukt'가 '유제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빈약한 독일어 어휘력과 눈앞에 진열된 상품을 매칭하면서 익힌다. 그뿐인가, 필요하거나 궁금한 제품은 카트에 담아 집에 가져간다. 그 과정 중에 제품 명이나 설명란, 영수증에 표기된 독일어 등에 끝없이 노출된다. 예상치 못했던 반복 학습은 '언어의 감'이라 불릴만한 '눈치력'을 상승시켜 준다. 바로 이렇게.

하루는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 곧장 'Getränke, ' 음료 코너로 향했다. 유독 많이 진열되어 있고 몇몇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게 확연히 눈에 보이는 제품 중 분리수거가 용이하고 당장 기숙사까지 들고 가기에 무겁지 않은 것으로 고르고 싶었다. 고민 끝에 선택한 주스는 'Hohes C'였다. 높은 씨(c)라는 이름의 뜻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타민 씨를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독일의 흔한 오렌지 주스였다. 그런데 패키징을 살펴보니 Hohes C에서 나오는 오렌지 주스는 종류가 두 가지였다. 유독 한쪽에만 'mit Fruchtfleisch'라고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mit은 영어의 with, 그러니깐 '어떤 것과 함께, 포함하는'이라는 뜻의 전치사이니깐 이 쪽에 있는 주스는 여기 있는 주스에는 없는 무언가가 더 들어가 있구나. Frucht는 과일이고 Fleisch는 고기, 살인데... 과일의 고기, 과일의 살이라면... 아!'

갈증을 달달하게 해소하려다가 '과육'이란 독일어 단어를 유추할 줄이야. 그날 처음 사 마신 Hohes C는 이후에도 나의 최애 독일 주스로 장바구니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슈퍼마켓을 들락날락하는 건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놀이시간과 같았다. 장바구니가 몇 번이고 채워지고 비워지면서 나의 독일어 생활력도 커져만 갔다. 맛있게도. 감사하게도.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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