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설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여행인 거라고. 명언이라 생각했다. 아직 짐을 싸지 않고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여행지를 공부하며 여행 중의 나(또는 우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했던 적이 많았으니까. 그렇다고 숱한 여행이 편하고 좋기만 했느냐? 그건 또 아니다. 집을 떠나야 했고, 시차나 언어의 장벽, 제한된 빨래 횟수 등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고, 기왕이면 여행지의 문화가 나의 문화와 다르더라도 이해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름을 이해하는 덴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다. 여행지에서만큼은 평소와 달리 초인적인 체력을 발휘하는 나였지만,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곯아떨어지는 것도 나였다.
그럼 여행을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에이, 힘들어도 결국엔 내게 좋은 것이 여행인데 그럴 수야 있나. 고됨에 방점이 찍힐 때마다 그 고됨의 강도를 덜기 위해 투자를 해서 좋은 것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 갔다. 오래 걸어도 편한 신발을 산다든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올 일상과 집을 기억하며 인내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한다든가, 아니면 이렇게 글로 남겨서 잊힐 개인사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든가.
특별히 이번에 소개하려는 여행은 여러모로 내게 새로웠다. 우선, 가보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류큐 왕국이었으나 이제는 일본이 된 오키나와였다. 두 번째, 남편과 시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하는 첫 여행이었다. 세 번째, 내가 직접 고른 여행지가 아니었다. 고로 찾아보기 전까지 여행지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보통 여행지를 정할 땐,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이 있어서 궁금증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여행을 결심했지만, 이번 여행은 시어머니께서 "여기 가고 싶다" 하는 의사 표현을 하셔서 기획한 여행이었다. 네 번째, 시어머니의 환갑 생신을 기념하고자 떠난 여행이었기에 주인공이 있는 여행이었다(그러나 여행 전야부터 주인공 자리를 찬탈한 자가 있었다).
여행 기간은 3박 4일. 입출국 수속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여행의 강도와 신선도는 높디높았다. 먼저, 일본어 능력자가 나뿐이었다.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정과 관광산업 발달의 영향으로 영어가 비교적 잘 통한다. 하지만 그래도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다. 더구나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가 나 혼자라면, 갖은 통역과 주문, 주의 사항 전달 등의 역할 또한 고스란히 내 것이란 소리다. 외국어 학습을 좋아하는 나여도 이런 상황은 피곤해지기 쉽다. 그리고 이제 겨우 결혼 2년 차였다. 시부모님께선 늘 나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지만, 그렇다고 그분들 앞에서 너무 풀어져선 안 될 것 같다. 그게 남편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생각이 든다(누가 뭐라고 한 적 한 번도 없다. 그냥 내 나름대로 정한 기준이 그렇다). 넷이서는 처음 떠나는 여행이 국내도 아니고 해외여행이었다. 만약의 사건 사고에 대비해야 했고, 기왕이면 알차게 3박 4일을 보내고 왔으면 해서 파워 J가 욕심을 좀 부리기도 했다. 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행지라 공부할 게 많았다. 사전 조사 중 인상적이었던 건 오키나와만의 아픈 역사와 이색 식문화였는데, 그 부분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여행 일정을 짜보려고 구글 지도와 유튜브, 여행 책자와 블로그 리뷰를 얼마나 찾아봤는지.
갖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위안이 되었던 건 어찌 되었건 간에 시간이 흐르고, 다른 어떤 것과 같이 여행에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법칙 때문이었다. 함께 여행을 다녀와보자고 마음을 먹은 뒤로는 어떻게든 일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오키나와에 다녀온 지 두 달이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브런치에 에세이를 연재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게, 우당탕탕.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가볍게, 여행 전야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가벼운 일화 하나는 곁들여야 독자들의 입맛이 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서.
2024년 9월 24일 화요일. 추석 연휴가 막 끝난 가을이었다. 나는 거실에 캐리어를 펼쳐 두고 빠뜨린 짐이 없는지 확인하며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오키나와에 태풍이 불어닥칠 시즌이라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날씨가 변덕스러워 여행이 즐겁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고작 날씨로 호불호가 갈릴 여행이었다면 시작을 안 했겠지. 비가 와도 즐거운 여행일 수 있잖아. 같이 가는 사람들이 중요하니까.'
나름 정신 승리를 이뤘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꿀꿀한 것도 아니고 묘했다. 돌아보면 그 묘함은 난생처음 가보는 여행지와 처음 동행하는 여행자들로 인한 긴장감이었다.
반면, 남편은 배달 어플로 교촌치킨을 주문하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수서역에 내려 우리들의 신혼집으로 오고 계셨다. 목포에서 수서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이른 저녁을 챙겨 드시고 집을 나서셨어도 수서역에 내리면 충분히 배가 고플 수 있는 여정이었다(남편이 치킨을 주문하고 있던 이유였다).
띵동. 어, 치킨이 왔다.
곧이어 또 띵동. 이번엔 시부모님이 오셨다. 오시는데 피곤하시진 않았는지,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안부를 묻는 말들이 오갔다.
다음날 아침 9시 15분 비행기였으니까, 새벽같이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몇 조각씩 집어 먹고서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음, 그래, 치킨도 제때 왔고, 어머니 아버지 컨디션도 좋아 보이고. 계획대로야.' 조금 안심했다. 남편은 접시를, 나는 잔을 꺼냈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때였다.
"나 새아기 옆에 앉으련다."
시아버지께서 갑자기 몸을 베베 꼬시면서 부끄럽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네? 갑자기? 왜요? 시어머니께서 호탕하게 웃으셨다.
"너네 아빠, 앞니 없는 거 보여주기 민망해서 그런가 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병원과의 일정 조율 실패로 임플란트 시술을 끝까지 받지 못하셨고, 임시방편으로 가짜 앞니를 끼고서 여행길에 나셨다는 이야기였다. 뭘 먹어야 할 때마다 가짜 앞니를 잠시 빼두고서 먹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시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시아버지는 자신이 앞니를 빼는 걸 내가 혹시라도 지켜볼까 봐 민망해하신 거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시아버지께서 굳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좀처럼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란 점이었다. 괜히 자리 이동을 제안하신 탓에, "왜요?"라는 질문이 오가게 만들었고, 상황을 모두가 알아버렸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나는 여행 내내 시아버지가 식탁에 앉을 때마다 시아버지의 앞니를 의식했다. 시아버지가 피하고 싶은 상황 중 하나를 스스로 자초한 셈이었다.
앞니 빠진 얼굴의 주인공은 주로 천진난만한 어린이였다. 그런데 시아버지에게서 그 얼굴을 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평소에 워낙 소년 같이 사시는 분이라 그 모습이 어울리지 않았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글감을 던져 주실 줄은 몰랐다. 앞니로 간장양념 치킨의 튀김옷을 배어물 때마다 멈칫했다. 있어야 하는데 없는 시아버지의 앞니가 떠올랐다(그런데 웬걸, 곁눈질로 보니 아주 재빠르게 살을 발라내고 계셨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몰랐다. 한 가정의 사자가 앞니 두 개와 맞바꾼 게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