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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엔 포도가, 시장엔 서점이

첫 번째 자유시간

by 프로이데 전주현

"한 시간 반 뒤에 저희가 방으로 찾아갈게요. 좀 쉬셔요." 자유시간을 알리는 인사였다. 시부모님 방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은 수고했다면서 나를 꼭 안아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워서 여름옷으로 갈아입고서 숙소 주변을 탐방하기로 했다.


평화거리에서 국제거리 방향으로 걸었다. 국제거리는 나하의 쇼핑 일번지로, 길에서 마주친 기념품 상점들만 수두룩했다. 이 일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먼저 복구 작업이 이뤄진 구역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전쟁을 경험한 오키나와 어르신들 사이에선 '기적의 1마일'이라 불리기도 한단다(<리얼 오키나와> 80쪽). 국제거리의 뒷길은 평화거리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메인과 뒷길을 합쳐 부르면 '국제-평화 거리'가 되는 셈인데, 아무래도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져나갔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지 않나 싶다.


남편과 둘이 걷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시아버지께서 너무 앞장서서 가시진 않는지, 시어머니의 무릎은 괜찮으신지, 모두 현지 에티켓을 존중하면서 여행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유시간인만큼, 둘만의 시간인 만큼, 귀여운 게 눈에 들어오면 "이거 귀엽다!" 하고 외치고 재미난 조형물을 보면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웃으면 그만이었다. 어디로 여행을 갈 것인가 하는 물음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여행을 갈 것인가가 여행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시장이 펼쳐졌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국의 시장 구경을 반기는 편이다. 생활력 가득한 풍경 속에서 재미난 식재료를 구경하고, 색다른 밥상의 모습이 떠올리고,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비치한 간판이나 제품 설명 문구를 읽으며 현지인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장 보러 나온 이들의 옷차림이나 장바구니에서도 문화를 읽어낸다. 이처럼 역동적으로 마키시 시장을 구경하는 내내 눈에 가장 많이 눈에 띄었던 건 '바다 포도(우미 부도)'였다.


바다 포도(우미 부도): 해초. 지역에 따라 '그린 캐비아'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하나의 줄기에 작은 동그란 열매가들이 라벤더 꽃처럼 달려 있다. 바다 냄새가 진하게 나고 알알이 톡톡 터지는 식감으로 유명하다. 오키나와에서는 여러 요리의 고명으로 많이 쓰인다.



오도도독한 식감과 해조류를 즐기는 나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반찬거리였다. 아직 오키나와에서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은 상황이라 바다 포도 맛이 더 궁금했다. 푸근한 미소를 장착하신 가게 직원 분께서 내쪽으로 다가오셨다. 시식이 가능하단다. 한 다발(?)을 이쑤시개로 콕 집어 맛간장에 찍어 먹어보았다. 오도톡톡톡. 입 안에서 요란스럽게 포도알이 터졌다. 이름을 생각하자면 씨 없는 포도인 셈이었는데, 식감은 알이 조금 작은 연어알 같았다. 간장 없이 먹었더라면 해조류 특유의 짭조름한 기운만 느끼고 말았을지도 모른다(간장이 맛있네 이거). 바다에서 난 것이라면 일단 찌푸리고 보는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우리는 계속 걸어보기로 했다. 지도 없이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였을 때에만 마주할 수 있는 '우연'이란 이름의 선물이 있기 때문이다. 땅콩이 들어간 지마미 두부, 미니 파인애플, 타코라이스, 고야, 등... 화려한 식재료들 옆을 지나자 하와이안 셔츠와 서핑하는 캐릭터가 돋보이는 티셔츠를 파는 가게가 몇 보였다. 호오. 여유로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음 속도를 올렸다.


'시장 한가운데에 서점이 있다니!'


서점은 어느 나라가 되었건 여행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르는 장소다. 하지만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선 가족 여행이란 주제와 다른 일정 조율로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남편과의 자유시간에 우연히, 그것도 재미난 콘셉트의 서점을 만났다. 숙소에서 나를 꼭 안아주던 남편의 포옹이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선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서점으로 돌진했다. 부엉이가 그려진 간판에는 '우라라'라고 적혀 있었다.


우라라: 일본에서 가장 작은 헌책방. 오키나와 마키시 시장에 위치.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책방지기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책들을 비치하는 곳. 오키나와 관련서와 일반서로 섹션을 나눠 운영 중이다.
* 참고 블로그 링크


기성 출판 서적도 많이 보였지만 독립서적도 여럿 보였다. 독립출판 프로젝트 팀 '지음지기'의 일원으로서 바코드 없는 책들, 얇은 zine들에도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방금 전까지 신기해하면서 사진을 찍었던 오키나와 식재료를 그린 엽서도 여럿 보였다. 서점 곳곳을 구경하는 내내 신나서 호들갑을 조금 떨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책방지기 분은 허리를 꼿꼿하게 피고서 조용히 책을 읽으셨다. 그 풍경마저도 맘에 쏙 들었다. 왁자지껄한 이자카야 골목과 식재료 상점, 기념품 가게 사이에서 책을 팔고 있다니. 생활력 넘치는 공간인 동시에 낭만이 돋보였다.


자그마한 우라라를 속속들이 구경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고고한 책방지기 분 앞에 엽서 네 장을 들이밀었다.


"카이케 오네가이시마스(계산 부탁드립니다)."


남편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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