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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 안 나냐

체크인 전

by 프로이데 전주현


멋진 여행 기념품으로 나는 종종 식기류를 꼽는다. 엄마가 여행지에서 꼭 하던 그릇 쇼핑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덕분이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집까지 무사히 들고 오는 게 고역이지만, 지출이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한 두 개씩 꼭 사 오려고 한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기 나름이고, 그때마다 먹을 것을 덜어낼 그릇이나 잔은 필요하니까, 이만큼 실용적인 기념품도 드물다.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음식을 즐기면 아무래도 배가 더 부르다. 그렇게 생각하면 추억은 꽤 고열량이고 추억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의 여행 짐 챙기기엔 택배 박스에서 고이 골라내 보관하던 뽁뽁이가 빠지질 않는다. 혹시나 여행지에서 데려올 식기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오키나와 여행 때도 뽁뽁이를 챙겼다. 숙소 바로 앞에 쓰보야 도자기 거리(쓰보야 야치문 도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 12세기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도자기 산업은 1616년 가고시마에서 여섯 명의 조선 도공이 오키나와에 정착하면서 커졌다고 한다(<리얼 오키나와>, 81쪽). 이후엔 청나라에 도공을 파견하고 또 청나라의 선진 자기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도쿄에서 캇파바시 주방도구거리와 교토의 니시키시장을 구경하면서 재미난 반찬 그릇을 몇 점 샀던 경험을 떠올리며 시부모님을 도자기 거리로 안내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까진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기에 그 시간 동안 도자기 거리를 구경하면 일정과 일정 간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질 거라 생각하면서.


사실 도자기 거리 탐방의 첫 일정은 점심식사였다.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한 끼, 비행기에서 한 끼를 다 챙겨드셨던 시부모님께선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인천공항에서의 한 끼로 배가 불러 기내식을 건너뛴 상태라, 도자기 거리에 진입했을 때 약간 허기졌었다. 하지만 시부모님께서 배가 부르시다고 하셔서 점심을 거르고 말았다. 숙소에 체크인하고서 시부모님께 휴식시간을 한 시간 반 드리고 나서야 허겁지겁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오니기리를 입에 욱여넣었다. 바로 구경하면 배고프지 않겠니, 하고 한 번만 물어봐 주셨으면 어땠을까.


무작정 걸었다. 유명세에 비해 매우 고즈넉한 골목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구글맵을 다시 확인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상점마다 팔고 있는 물건이 차별성이 크진 않아서 모두 다 들어가 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호평이 자자한 상점 한 곳을 목적지로 삼고서 한 두 곳 정도 더 즉흥적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남편은 평소에 요리를 즐겨하며 셰프를 자처하는 입장이었고, 평소 시아버지보단 시어머니 편을 드는 경향이 있었기에, 도자기 거리 탐방에 눈을 반짝였다. 시어머니께서도 집밥 경력을 오래 쌓아오셨고 평소 산책을 즐기는 분이셔서 잘 따라오셨다. 그러나 우리의 사자, 시아버지께서도 도자기 거리 구경에 흥미를 보였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쇼핑을 반기는 아버지들은 드문건가.


지갑문이 열린 것 역시 목적지 삼아 두었던 가게에서였다. 오키나와 여행 자체가 시어머니께 드리는 환갑 선물이었지만 기왕이면 자그마한 물건 하나를 여행 중에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준비한 서프라이즈였다. 그 마음을 귓속말로 전해드리니 시어머니께서 배시시 웃으셨다. 잠깐 고민을 하시더니 "난 이게 귀엽다." 하면서 강아지와 고양이가 그려진 라테 잔을 두 개 고르셨다. 여행의 주인공이 기뻐하자 남편과 나도 고삐가 풀렸다. "우린 뭐 사지?" 하면서 가게를 뒤지다시피 돌아다녔고, 오키나와의 푸른 바다를 담은 밥그릇 두 개를 골랐다. 가게 직원에게 결제와 포장을 부탁하고 대기 시간이 잠깐 생겼다. 그때 나는 사자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혹시 여행에서 소외되신 건 아니겠지?' 웃고 계시진 않았지만 심각해 보이시진 않았다. 이때다 싶어서 근처 카페에 들르자고 제안했다. 카페에 가면 뭐라도 좀 먹을 수 있을 테니.


멀지 않은 곳에 평점이 괜찮으면서도 조용한 카페가 있다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오키나와의 뙤약볕을 피하면 딱 좋을 시간이기도 했다. 체렝, 하면서 종을 울리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4인 테이블을 안내받았다. 오키나와 카페도 한국의 여러 카페들처럼 1인 1 메뉴를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어디 보자, ' 통역관인 내가 가장 먼저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여행 책에서 본 메뉴와 보지 못한 메뉴를 동시에 발견했다. 아는 메뉴는 일행 모두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건 젠자이라고, 오키나와식 빙수예요. 얼음을 갈고서 흑설탕을 넣고 졸인 강낭콩 소를 넣어 먹는 게 특징이래요. 덩치는 산만해 보여도 금방 한 그릇을 뚝딱 해버리는 디저트랍니다. 하와이에서 파는 빙수들도 이런 모양들이 많던데, 오키나와가 괜히 일본의 하와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가 봐요. 일본 본토에서는 따뜻한 단팥죽을 의미하지만 오키나와에선 다르다네요."


그리고 모르는 메뉴. 이름이 꽤 귀여웠다. 부쿠부쿠차.


부쿠부쿠차(bukubuku tea): 류큐 왕조 시절, 귀족들이 마셨던 진귀한 차 중 하나로, 재스민차에 볶은 현미를 쪄서 만든 거품을 얹어 마신다. 부쿠부쿠는 거품이 일어나는 모양을 뜻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거품이 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해서, '좋은 건 더블로!'라는 생각으로 부쿠차가 아닌 부쿠부쿠차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차이길래, 먹는 방법까지도 웬 예배 양식처럼 빼곡히 적혀 있었다. 미신 같았지만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나는 부쿠부쿠차를 내 몫으로 주문하고서 음용법을 정독했다.


하나, 부쿠부쿠차를 들고서 고개를 숙여 인사합니다. (이 차를 주신) 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둘, 잔을 기울이지 말고 똑바로 들고서 차와 거품을 함께 마십니다. (혹시라도 이 방법이 불편하거든 준비된 티스푼을 사용합니다.) 부쿠부쿠차는 예를 갖춰 마시는 차이지만 그저 즐겁게 마시는 것도 부쿠부쿠차를 마시는 방법이겠습니다.


덩치만 큰 젠자이에 이어 거품을 가득 얹은 부쿠부쿠 차까지. 달콤하고도 구수한 시간이었다. 평소에 아이스크림을 즐겨 드시던 시아버지께서도 입에 단 게 들어가니 좀 표정이 부드러워지셨고. 무릎이 컨디션이 100%는 아니었던 시어머니께서도 시원한 곳에 앉아서 차를 즐길 수 있어 평온해 보이셨다. 그런데 맛있고 편한 시간은 오래가질 못했다.




"이제 가자."


사자가 재촉했다. 웬 도자기 깨지는 소리지. 종종 전화로 시어머니께서 고발하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두 분이서 가끔 스타벅스로 산책을 가시는데, 그때마다 시어머니께선 기왕 집에서 나온 김에 카페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하셨고, 시아버지께선 음료를 후딱 마신 뒤에 귀가하고 싶어 하셨다고 했지. 일기장을 펼쳐 카페 내부를 스케치하고 방금 마셨던 현미녹차 같은 부쿠부쿠 차에 관한 인상을 기록하고 싶었던 나 또한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좀 더 여유롭게 있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남편은 자신의 납작 궁둥이가 시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했었. 작 궁둥이는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에 취약하지 참.


카페를 나오는 길에 남몰래 괜히 고개를 끄덕했다. 방금까지 나를 즐겁게 해 주었던 부쿠부쿠차에게 전하는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남편은 내 얼굴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읽었는지 옆으로 살짝 와서 귓속말을 했다. '체크인하고 휴식시간 드리고서 우리 둘이서 나올까?'


며느리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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