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넷이 뭉쳤다.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이었지만 식사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시부모님을 고려하여 저녁을 먹으러 국제거리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남편과 자유롭게 돌아다닌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저녁식사 후보지로 저장해 둔 곳이 모두 문을 닫은 것이다. 소바 가게, 돈코츠 라멘 가게, 카레 집... 모두 다 휴무 팻말을 내걸어두었다(수요일마다 오키나와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파워 J는 속이 타기 시작했다. 구글맵이나 SNS 계정에 들어가 확인을 했을 땐 영업 중이라고 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게의 영업 일정과 온라인상의 정보가 싱크를 맞추지 못했나 보다.
'아 몰라.'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식당을 찾는 척하면서 미리 점찍어 두었던 소금 전문점(마스야)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마키시 시장에 이어 마스야에도 시식 코너가 잘 갖춰져 있었다. 오키나와 산 소금도 있었지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특산 소금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고기 전용 소금도 보였고 회, 튀김용 소금도 있었다. 특히 생선용 소금은 흰 살 생선용과 붉은 살 생선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해산물을 좀 더 맛있게 먹는데 정성을 기울이는 오키나와 현지인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결혼과 함께 남편과 함께 집밥을 차릴 일이 많아진 후로는 종종 여행지에서 식자재를 기념품으로 샀다. 특히 실용적이고 휴대가 편리한 향신료와 '그 나라 인스턴트 푸드(일명, 가루요리)'나 무게는 좀 나가더라도 가성비가 좋은 꿀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소금은 유용한 조미료니까 꼭 사가고 싶었다. 문제는 많고 많은 소금 중에 무얼 고르냐는 거였다. 아무리 시식이 공짜라지만 계속하다간 짠맛에 혀가 마비될지도 모르고. 아주 궁금한 소금 몇 가지만 골라서 맛을 보았다. 그러다 샐러드 간을 맞추기 좋아 보이는 블랜딩 소금(제노바)을 두 병 집었다.
가게 한편에선 아이스크림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유키시오라는 회사의 소금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란다. '단짠 조합이군.' 솔티드 캐러멜을 평소 즐기는 나로서 구미가 당기는 디저트였지만, 당장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도 모르는데 아이스크림부터 핥고 있을 순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시아버지가 계속 신경 쓰였다(일전에 적었듯이 사자는 쇼핑에 큰 관심을 가지질 않는다). 눈을 멀뚱멀뚱 뜨시면서 물건을 구경하기보단 우리가 빨리 가게에서 나오길 기다리시는 모습. 아아, 설마 지루해하시는 건 아니겠죠?
마스야에서 나오는 길이 슬쩍 어두워졌다. 국제거리에도 하나둘씩 불이 켜졌다. 길가에 심긴 야자수와 일본어 문자만 아니었다면 익숙한 '시내 풍경'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행인들 중 절반이 우리와 같은 외부인(여행자)였다. 오키나와가 관광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한편으로는 서울 명동이 떠올라 걱정이 깊어졌다. 관광객들이 자주 모이는 곳에서 조용하고 괜찮은 식당을 찾는 건 꽤 어려운 일인데. 적합한 저녁식사 장소의 기준이 확 낮췄다.
'어디든 좋으니 우리 밥만 먹게 해 줘.'
그러는 와중에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치란 라멘. 후쿠오카에서 시작한 이 라멘 가게는 일본 전역에 분점을 두고 있는 곳이었다. 라멘. 매콤한 맛. 고기 토핑 있음. 프랜차이즈임. 위험 부담이 적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 라멘 어떠세요? 드시고 싶어 하셨잖아요."
사실 오키나와에선 소바가 더 유명하다(우리가 알고 있는 소바와는 조금 다르게, 칼국수 느낌이 강한 로컬 푸드다). 하지만 '오키나와 여행=일본 여행'이라 생각한 시아버지께선 남편에게 일찍이 "가서 라멘 한 그릇 먹고 그러자, " 하면서 주문을 넣으신 적이 있었다. '그래, 좀 흔할 순 있어도, 안전한 메뉴지.' 남편과 나는 사자의 승낙을 받아내자마자 건물 지하로 향했다.
평소엔 대기가 많은지 가게 입구부터 줄 서기 안내판이 버젓이 보였다. 키오스크 주문을 하고서 안내받은 자리로 이동하는 시스템. 질보단 양으로 식사에 임하시는 시아버지께서는 "난 가장 든든한 거, " 하고 주문을 넣으셨다. 죽순과 계란, 김 등의 고명이 풀 세트로 올라가 있으면서 밥까지 따라 나오는 세트메뉴가 보였다. 다른 어떤 메뉴보다도 맛있어 보였던 그 세트로 네 개를 주문했다. 내가 키오스크에서 영수증을 받는 걸 확인하자, 직원이 다가와 우리를 가게 안 쪽으로 안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치렌 라멘이 혼밥 하기 좋은 곳이었다는 걸.
평소 아무리 사이가 좋더라도 가끔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주의인데(가족이라면 더더욱), 여행 첫날 저녁부터 그럴 줄은 몰랐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라멘 독서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들어와 있던 손님들은 서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는데, 면발을 흡입할 때만 들썩 움직이면서 쩝쩝 소리를 냈다.
"안 쪽부터 네 분 쪼르륵 앉으세요."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몇 분간은 온전히 라멘에만 집중할 수 있겠네.' 앉은자리 정면엔 차양막이 쳐져 있었고 아래 틈으로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서빙 구멍(?)인 듯했다. 오른쪽 벽면엔 추가 주문서와 내가 원하는 식사 방식(이를테면 '말을 걸지 말라. 조용히 먹고 싶다.' 같은 주문)이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왼쪽 구석엔 젓가락과 물컵이 놓여 있었다. 함께하자며 떠난 가족여행에서 이렇게 개인주의에 철저한 식당에 오다니! 묘하게 통쾌했다.
고등학교 야자 경험을 발판 삼아 독서실 책상 너머로 시부모님과 눈인사를 교환했다.
"맛있게 드세요. 큭."
1인 식사에 특화된 곳에서 설마 서빙 미스가 날까도 싶었지만, 시어머니와 나만 모둠 고명과 밥을 아주 늦게 받았다(직원들이 깜빡했다고).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시는데 뭐, 개의치 않았다. 메뉴 늦게 나온 것보다 따로 또 같이 라멘을 먹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반찬 접시로 훅 들어오는 사자의 젓가락도 없었고,모르는 이가 면발을 쩝쩝 대는 소리도 멀리서 메아리칠 뿐 내겐 크게 들리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