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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발 안 벗었다

둘째 날 아침

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6. 2024

미련하게도 나는 가끔, 내게 사건이 일어나길 바랐다. 고요히 흘러가는 일상이 소중한 줄 모르고 드라마틱한 전개와 그에 따른 충격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전후가 확실히 달라지는 경험을 하면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고 착각했다. 지금은 무탈한 게 최고라면서 일기장에 딱히 적을 게 없는 날을 더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런데 일어났다. 사건이. 좌우가 바뀌고, 신호체계를 새로 익히고, 구닥다리 내비게이션에 적응하. 렌터카를 인계받는 여행 둘째 날이었다.


사전에 5,000엔을 추가한 덕에 렌터카 업체 직원이 숙소 앞으로 우리를 픽업하러 왔다(추가금을 내지 않았더라면 공항으로 다시 서, 거기서 렌터카 업체로 향하는 셔틀을 타는 번거로운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한인이 운영하는 업체로 렌터카를 예약해 두었다. 한국어를 하시는 직원 분이 있다는 게 맘에 들었다. 아무래도 운전자로 수고하실 시아버지께서 나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 설명을 들으실 수 있으니 덜 불안해하시지 않을까 하여. 그런데 막상 안내받은 사무실로 가보니 한국어는커녕 영어조차 미숙한 일본 청년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자동차도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낡았고. 하지만 이제 와서 계약을 무를 수는 없었다. 당장 다른 업체에서 빌리기도 힘들었고.


우리는 기본적인 안내 사항을 듣고서 자동차에 탑승했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오늘의 일정이 있으니 움직여야 했다. 샛노란 단무지 옷을 입은 차는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아가사 박사님의 비틀 과 닮았었다. 비틀의 사촌형쯤 되는, 노린재? 같은 인상이었다. 시어머니와 나는 뒷좌석에 남편은 조수석에 탑승했다. 그런데 시아버지께서 타질 않으셨다. 차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건 아니지 않나, " 하면서 불평 중이셨다.


보다 못한 남편이 사자를 불러 세웠다. "할머니? 그만하고 타보셔요." 할머니는 목포 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고음이었다. 손이 많이 가셨던 남편의 친할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꼭 닮은 사자에게 주의를 줄 때 쓰는 호칭이었다. 그러니까 "할머니, " 하는 말에는, [아빠, 또 할머니처럼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어서 와서 할 일을 하세요. 상황 파악을 하세요. 진정하세요.]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여행 초반부터 남편은 강조했었다. 할머니 세 번이면 이번 여행이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일지 아닐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삼진 아웃 같은 원칙이었다.


사자 입을 삐죽 대면서 운전석에 앉았다. 시어머니는 특유의 푸근한 표정으로 사자를 다독였다. 더 물어볼 건 없는지, 이대로 출발해도 되는지, 내비게이션 준비 다하고 출발하자고. 교통정리엔 역시 시어머니의 지혜가 필요했다. 근데 그게 사자의 귀에 제대로 들어가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여행 몇 달 전부터 일본에서 운전하는 시뮬레이션을 하셨다지만, 운전에 있어선 우리 넷 중 가장 선배이자 경력자였지만..  상상과 현실은 다르질 않은가. 겪어보지 않고선 모르는 일이다. 긴장감을 쉽게 늦춰선 안 될 것 같았다.


오른쪽이 우선되던 게 왼쪽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그게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런 와중에 렌터카 사무실에서 차를 끌고 나오자마자 길을 잘못 들었다. 사자는 본인이 실수하는 이유를 잘못 빌린 노린재 때문이라 했다. "할머니?" 남편이 다시 주의를 주었다.  번째 할머니가 나오자 사자는 다시 조용해졌다.


렌터카를 타고 이동할 제1의 목적지는 오키나와 섬 북부, 츄라우미 수족관. 편도로 약 두 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이거 괜찮을까.' 다행히 나하 공항 근교를 벗어나 해안 고속도로 쪽으로 빠지자 도로가 비교적 단순해졌다. 한국에서의 운전 습관 때문에, 차가 자꾸 왼쪽 차선으로 붙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부드럽게 사자에게 알려주었다.


"아빠, 조금만 가운데로 가주세요."

"이게 습관이 아무래도 그래가지고. 이제 되었냐?"

"네, 좋아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빠, 조금만 가운데로."

(차를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이며) "됐냐?"

"네, 좋아요."


그리고 또다시,


"아빠, 차선 지켜주세요."

(차를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이며) "너는 이렇게 가는 걸 좋아하더라."

"제가 그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게 가운데이고, 안전해서 그래요."


(...)


(차가 제대로 가고 있었다.)


"아들아, 나 잘하지 않냐?"

"네, 이대로 가주세요."


(...)


"아빠?"

"아 알았어." (차를 오른쪽으로 홱 움직이며)

"천천히요."


그렇게 한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자는 뒷좌석에 앉은 시어머니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여보, 편하게 있어?"

"네. 이대로 가시면 됩니다."

"새아가도 그렇대?"


여기서 장난을 좀 쳐보기로 했다.


"아버지, 저 신발 아직 안 벗었어요. 안 되겠다 싶으면 차 문 열고 어머니랑 나가서 버스 타려고요."


긴장하시라는 의미도 있었고, 긴장 푸시라는 의미도 있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까르르 웃었다. 그 후 뒷좌석의 안부를 묻는 사자의 말이 달라졌다.


"아직도 신발 안 벗었어?"


달리는 노린재 옆으로 푸르른 바다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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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책임진 조수석의 남편이 노린재를 아련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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