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정을 조율하는 사람으로서 간과한 게 있다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여행 중에도, 시아버지께서 힐링을 강조하셨다는 거였다. 물어봤어야 했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힐링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라면 좀 나았을까.적어도 오키나와 여행 중 나에게 힐링이란, 사건 사고 없이, 남편과 내가 계획한 대로 일정을 소화하는 걸 의미했다. 애초에 일정을 짤 때, 두 분의 체력과 먹성과 오키나와의 역사와 특징을 고려했기에 그를 그대로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멋진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힐링은 나의 힐링과 결이 좀 달랐던 것 같다.
노린재를 타고 가는 내내 시아버지께선 바다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남편은 그때마다 도로 한가운데로 주행해 달라고 부탁했고, 운전자는 어느새 또 사자가 되어 조수와 실랑이를 벌였다.
"달릴만한데, 저기 드라이브 좀 하다가 올까?"
"아빠, 차선 지켜주세요."
(...)
"저기 다리 한번 건넜다가 오면 안 되나?"
"수족관 가는 길이니까 우린 직진해야 해요."
(...)
"잠깐 차 세우고 바닷가에 내려갔다 올까?"
"아빠, 진정해요."
아무래도 사자는 물에서 뛰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는 오키나와의 명물, 추라우미 수족관으로 향해야 했는데. 사자는 해안도로 곳곳에 무리 지어 있는 서퍼들과 수영복 차림의 관광객들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 하는 수없이 액셀을 밟았다.
산과 바다 중에 무엇이 좋으냐고 물으면 나는 바다라 답하는 사람이다. 그때 내가 떠올리는 바다는 수영복 차림의 모래사장보다는 나의 시선과 발길이 닿지 않는 바닷 속이나 심해 쪽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몇 번이고 돌려봤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때문이지 않을까. 바다 생물이 바라보는 바다는 좀 덜 무섭고, 육지 생물이 바라보는 것만큼 신비로우면서도, 왠지 모를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런 내가 오키나와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여행 책자에 소개된 추라우미 수족관을 놓칠 리 없었다.
또바다는 오키나와의 생태계와 식문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재였다. 그를 주제별(산호가 자랄 수 있는 얕은 바다 테마관, 오키나와 주변 바다를 흐르는 구로시오 해류 속 테마관, 심해 테마관)로 전시해 둔 츄라우미 수족관이라면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는 시어머니의 흥미를 사기에도 충분했고, 자연환경에 소년처럼 반응하시는 시아버지께도 나쁘지 않을 법한 방문지라 생각했다.
그래서 츄라우미 수족관을 다녀온 소감은 어떠하냐고? 음, 1975년 오키나와 엑스포의 유산이라는 명성에 비해 지금껏 경험했던 수족관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오히려 평범했다. 물론 대형 수조에서 유영하는 고래상어와 대형 쥐가오리의 모습이 압도적이기도 했고, 바다의 미어캣이라 불리는 니시키 붕장어도 귀여웠으며, 양배추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처럼 먹어대는 매너티와도 사랑에 빠졌지만. 다 조금씩 어디서 본 풍경이었다.
가장 임팩트가 적었던 건 돌고래 공연이었다. 우선 뙤약볕 아래에서 공연을 봤어야 했기에 관람이 편치 않았다. 아무래도 몸이 편하지 않으면 감흥도 줄어들기 마련인가 보다. 또, 무대에 오른 돌고래들이 공연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계속해서 무대 가장자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훈련사를 모른 척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자의 개인행동이 돋보였다.
사연은 이러했다. 시어머니와 남편, 나는 모두 공연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햇빛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는 차양막 아래에 서서 공연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자는 지면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그대로 흡수하면서도 무대 가까이에서 돌고래를 보고 싶어 했다. 아 그럴 수 있지. 공연을 볼 때만큼은 모두가 함께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멀리서 사자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거-기-앉-아-서-보-셔-요-저-희-는-여-기-서-볼-게-요.]
공연 시작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커지자 무대 근처로 인파가 몰렸다. 사자는 불안했는지 자꾸 뒤를 돌아 앉아 언덕 위에 있는 우리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여-기-안-올-거-야-정-말?] 시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셨고 남편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약 20분 간 공연이 계속되었다. 나는 돌고래를 보다가도 괜히 사자가 앉은 쪽을 살폈다. 잘 앉아 계신 거겠지?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 모른다. 힐링이란 이름의 갈림길을 마주하고, 운전석의 사자가 드릉드릉 액셀을 밟기 시작한 것은. 사자는 가속도를 받고서 우리 셋과 다른 보폭으로 걷고, 무턱대고 메뉴를 고르고, 힐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