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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로 진입하세요

돌아가는 길, 이탈

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8. 2024

노린재에 올라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여정이었다. 다만 3분의 1 지점에 정차하고서 들렀다 갈 곳이 두 곳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오키나와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만자모(일명 '코끼리 바위')였다.


운전석에 앉은 사자의 어깨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수족관까지 무사히 왔으니 돌아가는 길은 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수석의 남편이 핸드폰 내비게이션 설정을 마치지 않았는데 노린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주차장 그늘을 나서자마자 우회전. 사자는 주문을 외웠다.


"우회전은 크게, 천천히 들-어-가-야--하죠!"

"아이고, 잘하셨어요!"


부드럽게 핸들링을 성공하자 뒷좌석의 시어머니께서 아이 다루듯이 호응을 하셨다. 조수석의 남편은 애써 가볍게 박수를 쳤고 난 가만히 있었다.


"아빠, 쭉 직진하다가 톨게이트 안 지나서 다른 길로 잠깐 빠질 거예요."

"왔던 길 그대로 간다면서?"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코끼리 바위 한번 보고 밥 먹고 가야죠."

"아들만 믿는다. 근데 나 지금 도로 중앙으로 잘 가고 있지 않냐?"

"네. 좋아요.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얼마나 지났을까. 곧 만자모였다. 남편의 핸드폰 내비게이션이 딱딱한 말투를 내뱉었다.


"***미터 앞에서 램프로 진입하세요."


어? 뭐라고? 물음표를 던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램프는 지니의 램프뿐인데. 도로 위에 그게 왜 필요하지.


"램프가 뭐냐?" 사자도 의아해했다. 장롱면허 소지자인 남편도 당황했다. 나는 다급히 인터넷에 램프를 검색했고, 그러는 사이에 노린재는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어? 우리 톨게이트 안 지나도 될 텐데? 방문 예정이 없는 톨게이트에 일단 왔으니 카드를 찍 다시 달렸다. 그러자 내비게이션 경로를 재탐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길 잘못 들었나 봐요. 아까 톨게이트 옆으로 빠졌어야 했네요."

남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램프가 뭔 그러지?"

사자도 머리를 긁었다.


그 사이 나는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에서 말하는 램프는 lamp가 아니라 ramp인데, 높이가 다른 도로 또는 지형이 만나는 곳에 있는 교차점이래요. 다른 도로와 연결되는 구간이라서 곡선이나 커브, 경사로가 많다네요. 아까 톨게이트 아닌 쪽으로 빠지는 곳이 상당히 굽어있었죠."


운전 경력이 긴 사자도 처음 듣는 용어였으니 그 누구도 화를 낼 순 없었다. 바로 다음 톨게이트에서 나가 ramp 수업료로 270엔을 지불하고 원래 가려했던 길로 다시 진입했다. 그렇게 만자모 공영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이용이 무료인 점은 여행 책자와 같았지만, 만좌모를 관람하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몰랐었다(<리얼 오키나와> 여행 책자에는 무료라 적혀있다). 인 당 400엔. 처음엔 어디 샛길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지불하지 않고 매표소를 둘러갈까도 싶었지만 에이, 또 명소라는데 유지 비용에 보탬이 되고자 시원하게 4인 매표를 하고서 관람 루트로 진입했다.


1726년 류큐 왕국의 국왕 쇼우케이가 놀러 와서 넓게 펼쳐진 풀밭을 보며 '여기는 만 명이 앉아서 놀 수 있겠다'라고 한 것이 만좌모라는 이름의 시초라고 한다. 산호융기초로 이루어진 거대한 해안 절벽의 바위가 코끼리와 비슷해서 각종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 <리얼 오키나와> 195쪽


들어가자마자 만자모란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크게 보였다.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연출해 둔 것 같았는데 주인공은 이 바위가 아닌 코끼리 모양의 해안 절벽 바위니 계속 전진하기로 했다. 얕은 경사의 산책로가 보였다. 길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동산 위였다. 우리나라에선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잎과 꽃들 위로 하늘이 파랗게 웃고 있었다. 사자는 다시 시아버지가 되어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이구. 아빠 하는 것 보고 배우는 아들이라니. 아들이 35살이 되도록 유효한 법칙인가 보다.


조금 더 걷자 코끼리 바위가 보였다. 나는 평소에 이름 붙여진 바위 보기를 꽤 지루해하는 편이다. 정말 그 이름처럼 생긴 바위도 있었지만 억지스러운 것도 많았고, 바위는 그저 바위일 뿐인데 너무 인간이 보기에 **를 닮았다 하면서 그 바위의 이름을 정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이유 모를 경계심 때문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 바위를 봐주지 않으면 내겐 의미 없는 바위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상상도 했다. 그런데, 오, 만자모는 제법 코끼리 같았다.


"우리 사진 좀 찍어주라."


시아버지가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찰칵)


한 다섯 걸음 좀 더 걸었을까?


"우리 여기서는 다 같이 찍자."

"아빠, 잠깐만요, 여기 사람들 먼저 찍고요."


다시 사진을 찍고 좀 더 걸었다. 이번엔 사자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도 찍을까?"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세지자 사자는 모자를 움켜쥐었다. 방금까지 내려다보던 바다에 누군가의 밀짚모자가 둥둥 떠 있던 게 생각난 모양이었다. 시어머니께선 분홍색 원피스를 바람에 흩날리며 뒷짐을 지셨다. 산책로는 길지 않았다.


산책로의 끝은 매표소가 있던 건물의 맨 꼭대기 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엔 푸드코트가 몇 있었고 테라스 좌석 많다. 앉을자리를 발견한 사자는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우리 여기 좀 앉았다 가자."

(...)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해도 지겠는데?"

(...)

"이게 힐링이지."

(...)

"해 지는 거 보고 가자."


사자가 힐링을 논하기 시작하자 남편이 내게 눈을 찡끗했다. 두 분께 자리를 양보하고 테라스를 슬쩍 빠져나왔다. 아래층에 위치한 기념품 숍이 보였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과 나는 그곳으로 달려가 기념품 쇼핑을 시작했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해결하듯이. 친구들에게 나눠준 대부분의 기념품은 만자모 숍에서 구입했을 정도로 꽤 괜찮은  상점이었다. 오키나와 기념품으로 여행 책자에 소개된 것들이 많았다. 만듦새도 나쁘지 않고. 


면세 혜택까지 받아가면서 쇼핑을 마치자 아차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나? 종종걸음으로 다시 테라스로 갔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파랗던 하늘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사자는 좀처럼 꺼내지 않는 핸드폰 카메라까지 꺼내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비록 시어머니의 머리는 만자모의 거센 바람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지만, 남편이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 그저 흐뭇하신 것 같았다. 길어야 20분 정도 있다가 가려고 했던 만자모였지만 두 분이 좋아하시니 더 오래 머물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어느새 또 시아버지로 돌아온 사자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남편과 나를 향해 말했다. 짧은 시간 내에 지난 시간과 지금을 돌아보고 감격스러때마다 사자가 내뱉는 말버릇이었다. 큼지막한 기념품 가방을 한 손에 꼭 쥐고서 미소로 화답했다. 바람이 한번 더 크게 불었다. 앞날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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