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0 댓글 1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너무 건강식이네

두 번째 저녁식사와 1차 폭발 위기

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9. 2024

하늘의 붉은기가 해수면 아래로 숨었다. 우리는 미련 없이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돼지고기 편백찜을 메인으로 하고, 오키나와 식재료를 활용한 반찬을 소량 주문할 수 있는 이자카야였다(시마부타야온나). 여유를 부린다고 부렸는데도 예약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차가 없다면 찾아오기 힘든 곳. 간판 주변을 기어 다니는 도마뱀들이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주었다.


내부는 가족 단위의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관광객은 적고 현지인으로 붐비, 평점과 리뷰가 좋은 식당이라니! 기대가 컸는데 직접 오자마자 활기차고 맛있는 분위기를 보니 뿌듯했다. 나무 실내 장식과 다다미, 오키나와의 여러 상징물과 꼬마돼지 소품들, 은은한 조명까지. 몇 시간 구글맵을 보면서 열심히 검색한 보람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몰래 하이파이브를 했다.


카운터 직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잠시만 테이블이나 예약 일정을 알아봐 줄 테니 앉아서 기다려 줄 수 있냐고 했다. 천천히 하시라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빈 테이블이 있어서 해당 자리로 안내해 주겠다고 하셨다. 약속 시간에 늦게 오는 손님도 골치 아프지만 일찍 오는 손님도 못지않게 신경 쓰일 텐데, 친절하고 신속히 대응해 주시다니. 고마웠다. 역시, 외국에서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면 그게 아주 짧은 경험이더라도 여행의 전체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는 다다미 좌석도 있었고 바 형태의 좌석도 있었다. 우리는 그 두 좌석의 사이에 위치한 홀 좌석으로 안내받았다. 식탁 위에 꼬마 돼지 그림이 한 장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남편의 이름이 고이 쓰여 있었다. 내가 어쭙잖은 일본어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단 걸 알아서인지, 직원 분께서 주문 방법 등을 더 신경 써서 설명해 주셨다(괜스레 더 친절했달까? 우리가 한국어를 어떻게든 써보려는 외국인에게 좀 더 웃고 귀를 기울이듯이). 메인이 무엇인지, 가장 인기 있는 세트 메뉴가 무엇인지에 이어 주문은 QR코드를 이용해 달라는 부탁도 따라왔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메뉴를 슥슥 담았다. 이게 4인분으로 충분할까? 갸우뚱하던 찰나에 옆을 지나시는 직원 분이 보여서 붙잡고 이렇게 시켜도 괜찮을지 물어보았다. 주문 내역을 스캔하시더니 '음, 이건 여기 나오니 빼도 될 것 같고, 추가 단품 메뉴들이 있으니 괜찮을 것 같다, '면서 웃어주셨다. 나름 컨펌도 받았겠다 QR주문을 완료했다. 4인 기준의 편백찜 세트 메뉴와 둘이서 나눠 먹기 좋은 우미 부도(바다 포도) 계란찜과 지미마 두부(땅콩 두부)를 시켰다.


돼지고기로 하는 편백찜은 처음이라 기대가 되었다. 식탁 중앙에 찜통이 있으니 우리나라 고깃집 느낌과 비슷한 기분이 나서 어색함도 괜스레 적었다. 단품 메뉴들이 애피타이저처럼 먼저 등장했다. 남편과 오롯이 나눠 먹는 메뉴로 시켜 좋았다. 사자의 숟가락이 훅 들어올 일이 없을 테니까(여담이지만, 사자는 나를 처음 만나는 점심 식사 자리에서, 다 같이 나눠먹는 물김치 대접 안으로 자신의 숟가락을 몇 번이고 푹푹 담가서 나를 적잖이 당황케 한 적이 있었다). 쫀득한 식감의 지마미 두부는 식사 전 몰래 먹는 간식처럼 짜릿하게 고소했고, 우미 부도 계란찜은 일전에 마키시 시장에서 맛을 보았을 때처럼 오도독한 식감에 맛간장의 간과 계란찜의 부드러움이 더해져 먹는 즐거움을 배로 끌어올려 주었다.


이것저것 맛보고 있다 보니 편백찜 재료가 등장했다. 고기를 얇게 펴서 얹고선 그 위로 갖은 야채와 재료를 얹고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먹으면 되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편백찜 통을 꾸몄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재료를 하나둘씩 쌓으니 주문이 절로 외워졌다.


"양이 안 적을까?"

브런치 글 이미지 2

대식가 사자가 고기를 얹으며 말했다. 아, 먹어보지도 않으시고. 사자의 오랜 식습관을 뭐라 할 순 없지만, 매번 질보다 양을 따지시는 태도는 자주 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가성비만 따지다 보면 나를 대접하고 싶어 큰맘 먹고 사 먹는 것에도 딴지 걸기가 쉬워지고, 자녀와의 여행 시 명심해야 할 십계명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렇게 비싼 걸 뭐 하러 돈 주고 사 먹냐?" 하는 말실수를 하기도 쉬워지지 않는가. 알뜰한 식습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어머니께서도 가끔은 멋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한 끼 드시고 싶으실 텐데.  


"여보, 그렇게 막 쌓지 말고 얇게 펴세요."


사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어머니가 편백찜통을 관리하시느라 신나 보이셨다. 그래, 뭐, 먹어보고 부족하면 시키면 되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찜통 뚜껑을 닫자 직원 분이 다가와 기다리는 동안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주겠다고 하셨다(센스쟁이!). 덕분에 10분이 금방 지났다. 찜통을 열어보니 대충 집어넣은 고기들이 아직 다 익지 않았다. 다시 골고루 펴서 재배열한 뒤 5분만 더 쪄보기로 했다. 다시 한번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모락모락 한 김이 우리 네 사람의 얼굴을 강타했다. 담백한 향이 어났다.


"이타다끼마스(잘 먹겠습니다)!"


조리법이 간단해서 재료의 신선함이 잘 느껴졌다. 기분 좋게 먹었다. 등 뒤편에서 떠들썩하게 한잔 하시는 가족 손님들 덕에 나도 괜히 취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 둘째 날도 무사히 지나가는구나. 안도했다. 아. 안도하고 말았다. 무언가 툭 놓아버렸다. 그때만큼 사람이 취약해질 때가 어디 있다고. 평소였더라면, 숙소에 들어서면서 할 법한 그 생각을 맛있는 음식과 떠들썩한 분위기에 너무 일찍 해버렸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사자의 말이 내 안 깊이 들어와 나를 찌르지 않았을까? 가벼이 튕겨냈을까?


그 말은 이랬다.


"너무 건강식이네. 우리는 배불리 먹어야 하는데."


나도 안다. 한국인들이 '너무'에 담긴 부정적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 너무를 쓴다는 걸. 나도 자주 그런다. 그런데 맥락이란 게 있지 않은가. 사자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편백찜 재료를 찜기에 넣을 때 한 말까지, 모든 게 말해주고 있었다. 방금 '너무'는 부정적인 의미의 너무였다. 투정이었다. 불평이었다. 어렵사리 찾은 식당이었고, 큰맘 먹고 주문한 결코 저렴하지 않은 메뉴들이었다. 그런데 너무라고? 표정이 굳었다. 건강식이면 건강식이지 너무 건강식인 건 또 뭐란 말인가!


재미있게도 사자는 가게를 나설 때 말을 바꿨다. 막상 먹다 보니 배가 부르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노린재 뒷좌석에 탑승해 마음속에 글자 하나를 새겼다.


'할머니.......'


스트라이크 원이었다.






undefined
undefined
가게 간판 옆 도마뱀 문지기들이 보이나요?





이전 08화 램프로 진입하세요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