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 엄마가 사는 집, 익숙한 세계, 대구로부터 멀리 달려 나오는 길. KTX에 몸을 실은 지 한 시간 반이 조금 지나자, 차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노량진 일대와 한강 철교. '서울이네.' 어깨에 힘부터 들어갔다. 한국인의 타지 생활 1번지. 이곳에 산 지 십 년이 넘었지만 긴장감은 여전하다. - <이번 역은 압구정역입니다> 중에서
2024년 11월 2-3일. 금의환향까진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음지기란 이름으로 나의 고향, 어린 시절의 배경인 대구를 찾았다. <아마도 생산적 활동>이란 북페어의 참가팀으로.
배경엔 지역 독립 서점인 더폴락과의 인연이 있었다. 더폴락은 대구/경북 지역의 책 문화 활성에 앞장서는 서점으로, 지음지기의 처음이나 다름없는 두 권의 책,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와 <너와 나의 니은>을 받아준 입고처였다.
입고 문의 메일에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고자, 개인적인 이유로 대구를 방문했을 때 더폴락에 들러 "안녕하세요 ** 대표님, 메일로 먼저 인사드렸던 지음지기 작가 전주현인데요..." 하고 얼굴을 비쳤다. 웬 낯선 이가 다짜고짜 서점에 들어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하고서 경계할 수도 있었는데, 입고를 진행한 후 서점이 궁금해져서 찾아왔다고 자초지종을 늘어놓자 대표님의 얼굴이 한층 더 부드러워지셨다.
감사의 마음으로 서점 찾아와 주신 분들께 선물로 드리라고 지음지기 책갈피 몇 개를 전달드렸다. 그러면서 더폴락에서 주최하는 북페어 <아마도 생산적 활동>의 준비 소식을 짧게 여쭤보았다. 지역 북페어와의 인연을 지난 3월의 제주 북페어에서 끝내고 싶지 않았기에, 더폴락에서 10번째로 개최하는 북페어에 관해 물어본 것이었다.
"퍼블리셔스 끝난 다음에, 마우스랑 겹치지 않게 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와, 그럼 그때 저희 지음지기도 한번 지원서 써봐야겠네요. 놓칠 수 없죠 그런 기회를!"
그날, 서점 구경을 한참 하다가 친구에게 선물할 책을 한 권 사서 나왔다. 그리고 가을 초입, 더폴락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퍼블리셔스 테이블을 준비하던 중, 참가 확정 안내 메일을 받았다. 이로써 지음지기의 세 번째 북페어, 두 번째 지역 출장이 잡혔다.
노래하는 책, 읽는 음악
<아마도 생산적 활동>에선 책과 음악이 한 데 어우러졌다. 특히 LP를 직접 들어보고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는데 이제 막 그 세계에 입문한 나로서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기획이었다. 페어 장소도 색달랐다. 제임스레코드. 왁자지껄한 시내 가운데 숨어 있는 매력적인 바의 변신이었다.
한옥을 개조한 제임스레코드 건물로 들어오면 오른편에 LP로 장식된 벽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서 정원을 낀 안채(?)로 들어오면 지음지기 부스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담한 통로와 은은한 조명, 그리고 조용히 울려 퍼지는 음악까지. 느좋 북페어를 꼽으라 한다면 <아마도 생산적 활동>을 언급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손발이 척척
제주와 서울에서 3일간의 북페어에 단련이 된 덕분인지, 대구에서의 이틀 일정은 덜 부담스러웠다. 벌써 이번이 함께하는 세 번째 북페어라고, 부스를 꾸미고 정리하는 정연이와 나의 손이 제법 빨라졌다.
'이게 정연이가 말했던 프로 북페어 참가러의 자세일까? '전주현 작가'라는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있어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 이렇게 익숙해지는 걸까? 언젠간 이름표 없이도 작가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유일한 적(?)은 추위였다. 일교차가 슬슬 심해질 계절이었고, 부스 뒤쪽에 마련된 정원과 통유리창을 공유하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11월의 기운이 손끝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몸이 으슬으슬해지려 할 때마다 괜히 일어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글과 그림을 전시하는 지음지기입니다."
"지음지기 인스타 팔로우하시고 책 속 문장 뽑기 한 번 해보셔요."
"여기 스티커는 자유롭게 가져가시면 됩니다."
"이 책은 어떤 특징이 있냐면 말이죠..."
팀 소개와 책 추천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그나마 후끈해졌다.
흔치 않아서 더 소중해
나는 대구 출신으로서 '지역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 '서울이 아니어서 그런가, ' 하며 시작하는 말을 경계하는 편이다. 서울 밖은 다 시골 아니냐는 서울 토박이들의 말에 삐죽하며, 지역에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며 반박한다.
그런 내가 제주와 서울에 이어 북페어로 대구를 찾은 후에 일기장에 고이 남긴 후기가 있었다. 오롯이 나의 (몇 안 되는) 북페어 참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정확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그 내용을 동료 작가들과 나누었을 때 몇몇이 동조해 주었던 걸로 보아 아예 매가리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이곳에도 적어보려 한다.
서울이나 수도권에는 북페어 또는 그와 비슷한 행사가 많이 열린다. 사람들도 그런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지, 내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책에 관해 설명해도 '아, 나도 알아, 그런 거, ' 하는 심드렁한 표정을 내비치는 분들이 꽤 많았다. 반면, 지방에는 그런 행사 자체가 귀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마도 생산적 활동>처럼 콘텐츠가 탄탄하기 쉽지 않아서인지, 부스에 있는 사람들(창작자들)의 말을 엄청 정성스레 들어주셨다. 그런 독자님과 자주 만나기 위해서라도 글을 계속 써야겠네 싶을 정도였다.
지음지기 부스를 찾아주셨던 <아마도 생산적 활동> 방문객들께 어떻게 알고 오신 건지 여쭤보니, 관심 있는 주제인데 대구에서 열린다고 해서 버스 타고 왔어요, 하며 기뻐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었다. 대구 외 지역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행사라니! <아마도 생산적 활동>이 그만큼 내공을 다진 것 덕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역에 관련 문화 행사가 귀하기 때문이지도 않을까?
대구 출장을 다녀온 이후로 수도권 문화 집중 현상과 그로 인한 지방 소멸/소외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향 특수는 역시 친구들
학창 시절 친구들이 몇몇 찾아왔다(이게 바로 고향 특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멀리서 한눈에 "아, **가 왔구나! 어머, ***가 오다니!" 하며 알아볼 수 있었다. 부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근황을 나누고 사진을 찍고 준비한 설명을 발표처럼 하고, 정연이를 자랑스레 소개했다.
학생 신분으로 만났던 우리가 사회인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몇 명은 책에 인쇄된 내 이름과 작가 소개가 신기한지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도 했다. 그 스토리를 보고 ㅋㅋㅋ 하며 답장하는 시간이 나에겐 곧 북페어 디톡스 타임이 되었다.
친구가 책을 사가면 우스갯소리로 "오타 보이면 바로 톡 줘." 라면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 말 듣고 정말로 오타를 알려 준 친구가 있어 다시 한번 깔깔 웃었고.
맛있는 김밥 점심과 아늑한 공간, 멋진 음악, 귀여운 공식 포스터와 굿즈까지... 주최 측인 더폴락에 감사한 점이 참 많다. 첫 째날 저녁에 참가팀들 간의 친목 저녁식사를 준비했다는 소식에 (감기 몸살 기운으로) 선뜻 응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책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창작자들 간의 교류에도 힘쓰려는 것 같아 좋아 보였는데...
페어 마지막 날, 부스를 정리하는 시간. 정연이와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재빠르게 캐리어를 채워 나갔다. 저녁에 단골 삼겹살 집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2024년도 끝나가는군?"
"그러게요. 벌써 11월이니까."
"우리 올해 대단하다 참. 책 세 권에 페어 세 번!"
(보란 듯이 하이파이브)
"언니, 가기 전에 저기 밖에서 사진 찍고 갈까요?"
"춥지만 인증숏은 남겨야지."
이렇게 2024년 지음지기의 북페어가 막을 내리는 줄로만 알았다. "이런 문장" 다음엔 늘 그렇듯, 반전이 뒤따라온다.
+ 정연 작가의 지음지기 <아마도 생산적 활동> 후기가 궁금하다면? (읽기)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