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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침대 옆에 우뚝 서서, 기지개를 켜고, 암막 커튼을 걷고, 날씨를 확인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세수로도 가시지 않는 잠기운을 느끼며, 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리기까지. 1초의 행진은 계속된다. “일어난다”라는 전등에 불을 밝히자 수많은 불나방이 모여든다. -<너와 나의 니은> 중에서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믿는 편이다. 기회가 생겨 준비를 부랴부랴 할 때도 있지만. 준비된 자는 ‘이게 기회가 될지도 몰라’ 하고 기회감(?)을 쉽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를 놓치지 않는다. 이런 믿음 때문일까, 나는 매일 조금씩, 여러 것을 준비하며 지내려고 노력한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룰 큰 것을 기대하며 산다. 건물로 따지자면 하나씩 쌓아 올리는 벽돌집을 짓는 셈이다. 가끔 그 벽돌집이 젠가 보드게임처럼 위태로운 구조물을 쌓을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하나씩, 천천히 쌓아 올리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나를 차분하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하루 최소 15분의 듀오링고 프랑스어/이탈리아어, 하루 세 쪽 분량의 일기 쓰기, 하루 두 번 이상의 환기, 하루 세 번 티타임(그중 한 번은 반드시 커피), 하루 30분의 신문 읽기, 하루 한 번 (부모님께) 안부 전화, 일주일에 두 번 필라테스, 일주일에 한 번 평소보다 이른 기상, 일주일에 세 번 브런치 연재, 이주마다 한 번씩 독일어 스터디 모임, 이주마다 한 번씩 플롯 공부 모임, 한 달에 한 번 독일문화원 도서관 방문, 등… 나의 스케쥴러를 빼곡히 채운 체크리스트는 이처럼 대체로 작고 반복적인 활동들이다. '준비를 준비하는' 활동들이다.


이러한 나의 믿음은 지음지기의 쓰는 사람으로 지내면서도 강화되었다. 일 년 반 동안, 쓰고 그리고 연재한 것들이 모이니 기회를 여럿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 권의 책을 냈고, 제주와 서울, 대구 북페어에 참가했으며 지역/독립 서점에 입고를 했다. 작가로서 처음 계약서를 써봤고 동료와 주기적으로 정산을 했으며 이따금 독자들의 후기를 확인하며 ‘더 열심히 써야지,’ 하고 마음을 다졌다.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란 준비의 공식은 예나 지금이나 믿음직했다. 그 공식을 마음에 새기면서 대구 북페어, <아마도 생산적 활동>을 마쳤다. ‘이제 2024년을 떠나보내도 되겠어’라고 생각했다. 11월부터 왠지 모를 후련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11월 9일이었으니, 대구 북페어 디톡스를 한참 하고 있던 어느 늦가을 오후였다. 정연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똑똑! 언니, 행사에 참여할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는데 지음지기 팀으로 참여해도 된다고 해서, 혹시 12월 28일 토요일 비어 있어요? 근데 장소가 대전이에요. 언니가 일정이 괜찮은지~]


세상에! 참가 신청서와 입고 문의서 등... 매번 요청하고 부탁하는 입장이었는데 북페어 초대장을 받다니! 이런 적은 또 처음이었다. 감사했다. 어떻게 우리 팀을 알고서 초대장을 보낸 걸까, 우리 책을 읽어 본 걸까, 우리 인스타를 점검했을까,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지음지기의 어떤 부분이 주최 측의 마음을 샀는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간 정연이와 둘이서 쌓아 왔던 벽돌집에 문고리를 단 기분이었다. ‘우리끼리 뛰어놀던 벽돌집에도 문이 생겼어. 이제 이 문을 열고 사람들, 독자들을 만나러 갈 수 있어! 멋진 지붕을 완성한다면 그들을 나중에 우리 집으로 초대할 수도 있겠지?'


신속한 답장이 반가운 초대에 응하는 예의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024년 지음지기의 마지막 일정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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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오브 파타르의 공식 포스터(@patar.episode)


대전 북페어의 이름은 ‘에피소드 오브 파타르(episode of patar)’였다. 파타르는 고대 히브리어로 '해석하다, 의미를 부여하다, 꽃을 피우다'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한 겨울에 피어날 꽃, 그곳에서 오고 갈 의미 부여의 시간들.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에피소드 오브 파타르가 이전 북페어와 다른 점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음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 12월 28일 단 하루동안 열리는 페어였다. 여유롭게 있다 간다면 1박을 하면서 다녀와도 되었지만 기차표만 잘 구한다면 당일치기만으로도 소화할 수 있었다. 둘, 초청된 팀들이 둥그렇게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북마켓을 운영했다. 굿즈 부스들은 따로 모여 공간을 형성한다고 했기에 책들이 모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셋, 고로 교류전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북마켓 운영이 끝나고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재즈 콘서트를 구경하는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책을 판매하고 독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마음 쓰이는 것들이 많았다. 함께 자리한 작가님들을 알아가고, 초대받은 공간(이제 막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재생 공간)에 어우러지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파티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었다. 일종의 워케이션(work+vacation) 같았다. 특히, 한 해를 마무리 전에 모여 서로의 창작물을 공유하며 격려하는 시간이 꼭 나와 정연이, 지음지기를 위한 연말 선물 같았다. 그렇다면 이전 북페어들과 똑같이 부스를 준비할 순 없었다.


“아무래도 교류전 성격이 강하니까, 너무 상업적으로 가선 안 될 거 같아요.” 정연이가 말했다.

“서울과 대전에서처럼 책 판매와 지음지기 홍보에 치중하지 말고, 제주에서처럼 우리 둘이서 놀러 온 느낌으로 꾸며볼까?”

“맞아요. 소품도 좀 갖다 놓고.”

“종이가구 책진열장은 빼고 좀 더 심플하게.”

“크리스마스가 지난 때이지만 왠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도 이쁠 거 같고.”

“이케아에서 샀던 조명 하나 갖고 갈게. 책상에 길게 늘어뜨리면 딱이겠다.”

“인형도 몇 개 좀 들고 가요. 흐흐. “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초청을 받은 지음지기가 좀 달리 보이기도 했다. 연말을 준비하는 반짝이 조명들처럼 설렘도 커졌다. 주최 측에서 보내온 초대장의 이미지와 글귀도 마음에 쏙 들었다. 편지 봉투를 내세워서 그런가, 오래간만에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소규모 초대전, 교류전이란 생각에 처음으로 제작했던 ‘작가 명함’ 중 유독 빳빳한 것들만 골라 명함꽂이에 담아 두었다. 뜻밖의 북페어를 앞둔 기념으로 지음지기의 책들을 다시 카메라에 담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하듯이 12월 28일을 정성껏 준비했다. 그러던 중에 주최 측과 서면 인터뷰도 진행했다. 그때 받은 질문들을 2024년 일기장에 고이 새겨 두었다. 그중 네 번째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Q4.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하고 싶나요?
A4. 정연: 삶이 건네는 이야기를 따라가니 그림이 되었습니다.
주현: 예상치 못함이 좋습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믿는 편이지만,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한 적이 훨씬 더 많았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던 적이 흔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울다가 결국엔 웃었고, 말을 더듬다가도 다시 골랐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었던 것 주변에는 어떻게든 머무르려고 애썼다. '준비를 준비한다고' 아등바등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대비할 수 없는 상황들과 마주했다. 그때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 삶은 어떤지 몰라도 나의 삶은 임기응변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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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된다. 대전.” 내가 말했다.

“저도요. 공간도 시간도 사람도 따스할 거 같아요.” 정연이가 답했다.


우리는 함께 예상치 못함을 끌어안았다. 여태 준비해 오던 것들 덕분일까, 그 포옹이 낯설지 않았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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