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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Feb 19. 2025
호수가 될래. 외침이 되었건 속삭임이 되었건, 너의 솔직함을 받아내는 호수 말이야. 네 주변을 잠잠히 흐르다가, 공기 중 수증기가 되어 하늘을 떠다니고 싶어. 그러다 적당히 까다로운 구름을 만나 빗방울로 변신을 하고서 땅으로 뛰어갈 거야. 조금 돌아가더라도 망설임 없이 너에게로 갈 거야. 네 어깨를 적시고, 너를 안아줄 거야.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중에서



브런치 글 이미지 1

대전역에 내렸다. 매번 지나가기만 가던 역에서 하차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역사를 오가는 사람들 손에는 성심당 종이가방이 하나씩 들려 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여행안내 센터에는 어릴 적 보았던 캐릭터 ‘꿈돌이’가 여전히 노랗고 귀여운 실루엣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구경도 잠시, 나는 정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대전까지 운전해서 온 정연이는 도착이 예정보다 빨라서 북페어 ‘에피소드 오브 파타르'가 열리는 곳에 짐을 놓고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만났다. 





“건물이 엄청 이뻐요.” 정연이가 말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부터 느낌이 좋던데.”

”나무 인테리어가 아주 따스해요."

“다른 사람들도 왔었어?”

“제가 너무 일찍 도착해 가지고 민망했어요. 아마 1등이었을 거예요.”


역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파타르로 향했다. 단정한 나무 문 옆으로 심은 갈대(?)가 좌우로 몸을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입장과 동시에 가운데 난로를 기준점으로 디귿(ㄷ) 모양으로 한데 모인 부스들이 보였다. 엔틱한 카펫 위에 열기를 내뿜는 난로라니, 오래된 교실에 들어온 것처럼 아련해졌다. 우리를 알아본 태순 작가님과 스태프 분들이 인사를 건네셨다.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공간이 아름답다고, 대전 땅을 밟은 건 오늘이 거의 처음인데 기대된다고, …. 스몰 토크를 나누는 사이에 난로 열기로 두 뺨을 붉게 데워졌다.


지음지기의 위치는 왼쪽, 출입구에서 세 번째 부스. 바로 뒤편에 앙증맞은 창이 나 있어서 빛과 풍경을 잔뜩 활용해 가면서 부스를 꾸밀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서울에서 챙겨 온 쿼카 인형부터 올려놓았다. 그걸 본 정연이도 에코백에서 사슴 인형을 꺼냈다. 지음지기 스티커를 인형들 품에 하나씩 붙여주자 제법 마스코트 느낌이 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일일 아르바이트생 느낌으로 창틀에 올려두기로 했다. 부스 안내를 위해 주최 측에서 적어 주셨던 ‘지음지기’ 종이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이쁜 글씨체를 보고 있으니 머리가 말랑해졌는지, 다이어리에 챙겨 왔던 편지 봉투 생각이 났다. 에피소드 오브 파타르에게서 받았던 초대장을 떠올리며 종이 카드를 편지 봉투에 넣어 ‘편지’의 이미지를 강조해 보았다.


“파타르가 보낸 초대장에 답장을 하는 기분으로다가 어때?” 내가 말했다.

“오, 좋아요!”

“글씨 너무 이쁘게 잘 쓰셨다.”

(아직도 그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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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글 이미지 4



부스를 완성하고나서야 주변이 좀 더 보였다. 왼편에는 마운틴구구 작가님이, 오른편에는 박시시 작가님안도 작가님이 계셨다. 한 분은 터무니책방에서 샀던 책의 저자 분이셨고, 두 분은 2024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에서 처음 인사 드렸던 분들이셨다. 작은 공간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움이 더 컸는데, 특히 마운틴구구 작가님과는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면서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었다. 신혼부부의 일상에 관해, 특히 남편을 알아가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전해 들을 때마다 깔깔 웃었다(전해 듣지 못한 또 다른 재미가 만드신 책에 들어있을까 하여, 북페어가 끝나기 전에 작가님의 <대파와 물안경>을 한 권 구매하기도 했다).


마주 보고 앉은 부스들도 흥미로웠다. 어쩜 이렇게 재미난 팀들을 한 데 모으셨지 싶을 정도였다. 그중 기억에 남는 부스가 둘 있었는데, 하나는 대전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노네임프레스였다. 자그마한 누드사철제본(내가 좋아하는 제본 방식이다) 책이 눈에 들어왔다. 꿈돌이 스케치를 한 데 모은 책을 먼저 구경했지만 사서 나온 책은 대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시트지 폰트(추교은 장인의 글씨)에 관한 책이었다. 내가 책을 집을 때마다 부스에 계신 분께서 설명을 맛깔나게 해 주셨는데 (아, 탐나는 능력이야), 그 덕에 구매도 쉽게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다.


연필 농부란 귀여운 이름의 부스도 기억에 남는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우스꽝스러운 볼펜을 한 자루 들고서 주례회의장에 들어가는 걸 소소한 재미 삼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열심히 썼던 콩나물 볼펜에 부스 한편에 가득 꽂혀 있길래, “오잉, 콩나물?” 하면서 관심을 가졌다. 알고 보니 부스를 지키고 계셨던 작가님께서 콩나물 국밥을 너무 좋아하셔서 코로나 팬데믹 때부터 최애 콩나물 국밥집과 그와 비슷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나름의 방문 일지를 쓰신 게 아닌가! 덕심이 돋보이는 콘텐츠를 그냥 지나칠 수 있나(덕심만큼 그 사람의 열정을 보여주고, 삶의 의지를 나타내기 좋은 재료가 없다. 덕심 만세!). 나는 그 자리에서 <오늘 또 미가옥>이란 책을 한참 살피다가 “이거 한 권 주세요, 저” 하고서 지갑 문을 열었다.


북페어 장 뒤편에도 자그마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엔 주로 굿즈들이 모여 있었는데, 정연이가 준비한 들꽃과 들풀 포스터도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당시 브런치 공모전에 제출했던 (나의 첫)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갈매기였는데, 새를 그린 마운틴구구 작가님의 엽서들이 보이길래 소설 속 갈매기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그려진 엽서를 한 장 구매했다. 적고 보니 알겠다. 대전 북페어 중엔 내 책을 판매하는 것보다 행사를 즐기는 데 더 집중했다는 걸.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안 된 겨울날이고 갖은 북페어와 마감을 마쳤을 때라 그런가, 책과 아름다운 것이 어우러지는 시공간을 그저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나 보다. 사회적으로도 사건 사고가 많아 마음이 심란했던 것도 한몫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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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이가 그린 포스터 <봄의 들풀>과 꿈돌이가 돋보이는 노네임프레스의 책


단 하루동안 진행되는 행사였지만 방문객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아이와 강아지를 동반한 손님들이 많았고,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도 꽤 있었다. 뜨끈한 난로 주변에서 몸을 녹이는 강아지들과 지음지기의 인형들을 알아봐 주던 아이들 덕분에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북페어 종료까지 1시간 정도 남았을 땐 장내 혼잡도가 최고조에 달했는데, 그때 한 중년의 부부께서 우리 부스를 찬찬히 살펴 주시던 게 생각난다.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부터 <이번 역은 압구정역입니다>까지 한 권씩 설명을 드렸다. 설명이 끝난 뒤로도 책을 찬찬히 보시던 어르신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 책을 읽는 게 두 사람의 초심을 읽기에 좋겠죠? 어쩌면 가장 멋진 걸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시더니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를 한 권 사가셨다. 어르신의 말을 일기장에 새겼다. 계속해서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따뜻한 말을 남기시고 <숲도줍>을 사가셨던 어르신 부부따뜻한 말을 남기시고 <숲도줍>을 사가셨던 어르신 부부


북페어를 마치고 작가님들과 저녁 식사와 재즈 콘서트까지 즐기고서야 다시 대전역으로 향했다. 밤길 운전을 앞둔 정연이와는 대전역 앞에서, 마운틴구구 작가님과는 기차 매표소 앞에서 안녕을 고했다. 팔지 못한 책 몇 권을 담은 백팩을 고쳐 매고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아홉 시가 넘었지만 기차 탑승까진 아직이었다. 사람들의 손마다 들려 있던 성심당 종이가방이 생각났다.


‘튀김 소보로 두 개만 포장해 갈까?’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편이 떠올랐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 혹여 튀김 소보로 냄새가 다른 승객들에게 불편함을 줄까 봐 종이 포장 봉투를 꼭 끌어안았다. 고소한 냄새가 얼마나 센지 마스크를 뚫고서 코로 훅 들어왔다. 2025년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을 안고 귀가하는 기분이었다. 


계속 쓸 힘을 얻었던 귀한 토요일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8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지음지기(@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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