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톨 없는 러브레터의 고장

도보 여행과 영화

by 프로이데 전주현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때엔(라떼는 말이야) 학교 선생님들께서 영화를 보여주시는 일이 많았다. 주로 진도를 다 나갔을 때나 진급이나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습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을 때였다. 교실 왼쪽 앞에 마련된 텔레비전 아래 선반을 열어 비디오를 틀거나 컴퓨터 화면을 텔레비전에 미러링 시키고 VCD를 삽입했다.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보았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은 본인이 한참 빠져 있다던 애니메이션을 틀어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대표주자인 <나루토>였고,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은 자신의 별명이 도비라는 이유만으로 <해리포터> 영화만큼은 잘 틀어주셨다. 여름에는 역시 공포영화가 인기였는데, <쏘우>나 <장화, 홍련>, <13일의 금요일>을 꺅꺅거리면서 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모니터에서 가장 먼 자리로 옮겨 앉아 이어폰을 꽂고 책 속으로 도피했다. 공포영화는 잔상이 오래 남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영화 <러브레터>를 본 것도 학교에서였다.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보여주셨던 거 같은데,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이야 함박눈이 내리는 영화 속 풍경이 아름답고, 첫사랑에 얽힌 추억과 감정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애잔하고 고요하다면서 감탄을 한다만, 그땐 배우가 1인 2역을 소화한다는 설정에 먼저 혼란이 왔고, 남자 주인공이 뭐 하는 거지 싶었다(왠지 모르게 행동거지가 거슬렸다). 또, 이제 막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던 시기라 일본인들의 억양과 일본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쉽게 몰입하지 못했다(하품을 몇 번 했더라).


그랬던 내가 <러브레터>의 고장이라 불리는 오타루로 가족들과 당일치기 여행을 갈 줄이야.




눈 내린 풍경로 유명한 동네를 눈 한 톨 없는 계절에 찾아도 괜찮을까. 돈과 시간을 들여 가는 여행인데 기왕이면 여행지가 가장 이쁠 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안될 건 없지만 최적의 여행 타이밍을 놓치는 게 아닐까 하는 정. 행히 그 걱정은 일본의 쾌적한 가을 날씨 덕분에 싹 사라졌다. 한국에선 슬슬 얇은 겨울 옷을 꺼내 입고 다녔는데, 9월의 오타루를 거닐 땐 아우터도 없이 긴 팔에 7부 치마바지 차림으로 뽈뽈 다녔다. 또, 엄마는 휠체어에 타 있었고, 나는 9주 차 태아를 품고 있었으니, 여기저기 빙판길인 한겨울의 오타루보다는 9월의 오타루가 나은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종종걸음으로 오타루를 걷다가 에너지를 다 소모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구경한 곳은 오타루 오르골당이었다. 입구의 증기시계가 뿌우뿌우 소리를 내며 방문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가게 안은 반짝이는 조명과 아기자기한 음악 소리로 가득했다(꼭 크리스마스 동화 속 마을 같았다).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르골은 남편이 연애 중에 처음으로 건넨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라는 문장이 We wish your Merry Christmas라 잘못 적혀 있는 오르골이었는데, 별다른 꾸밈없이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소탈한 디자인이 남편(당시 남자친구)과 꼭 어울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your Merry Christmas라 잘못 적힌 문장도 괜히 더 특별하게 읽혔다. 가족 여행을 온 기념으로 내게 오르골을 하나 사주고 싶어 하던 엄마의 제안을 거절한 건 이미 내게 소중한 오르골이 하나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일치기 여행의 행선지들은 오르골당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가장 먼저 오르골당에서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있는 르타오 치즈케이크 본점에서 여유로운 디저트 타임을 가졌다. 2층 카페에 자리가 나려면 조금 기다려야 했기에 약 30분 정도 1층 야외 테라스석에 앉아 있었다. 대기 중에 달콤한 디저트 향이 코를 자극했다. 유혹을 이기기 어려웠던 남편은 맛보기용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와 휘낭시에를 하나 사 왔다. 넷이서 디저트를 한 입씩 나눠먹으며 대기 시간을 견디는데, 맞은편에 앉은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따뜻하게 데워져 나온 휘낭시에가 입맛에 꼭 맞은 모양이었다.


이게 뭐지?

휘낭시에. 버터 엄청 들어간 거.

맛있네 이거.


카페를 나온 후에도 아빠는 휘낭시에의 맛을 잊지 못했는지 1층 기념품 숍에서 휘낭시에를 한참 찾아다녔다. 6개짜리, 12개짜리 선물 상자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하는 게 귀여웠다. 안 되겠다 싶어서 "아빠, 그냥 사. 맛있어했잖아." 하고 아주 조금 소비를 부추겼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


그럴까?


내심 기다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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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루 오르골당 내부 모습(왼쪽)과 건너편에 위치한 르타오 본점의 건물(오른쪽)


그 이후로는 르타오 옆에 위치한 상점가, 사카이 마치를 따라 오타루 운하 쪽으로 계속 걸어 다녔다. 유리공예 상점과 공예품점, 간식 매대 등을 구경하면서 여행용 휠체어의 위력을 한번 실감하고, 엄마의 별명이 괜히 '쇼핑의 여왕'이 아니었다는 걸 느꼈다(쇼핑할 때의 엄마는 체력이 남다르다 정말).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여행 오기 전 브이로그를 너무 많이 챙겨봐서인지, 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도 풍경이 너무나 눈에 익어 있다는 거였다. 쉽게 "우와!" 하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았다. 조용하네, 아기자기하네. 딱 그 정도의 감상. 그때마다 예의 질문이 또 떠올랐다.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달랐으려나? 그랬으면 히로코의 편지를 들고 이츠키에게 가던 우체부처럼 미도리 편지지에 뭐라도 끄적이고서 오타루역으로 달려봤을 텐데(이렇게 적으니 <러브레터>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같네). 이처럼 미련한 여행자는 여행지를 200% 느끼기에도 아까운 그 시간에 딴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놓고 숙소나 집으로 돌아와서 왜 좀 더 그 시간을 즐기지 못했을까, 면서 스스로를 다그친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덧 오타루 운하 앞에 도착했다. 생각한 것보다는 길이가 짧고 규모가 아담했다. 이렇게 조용하고 소박해 보이는 곳이 한때 삿포로보다도 번성했던 곳이라니. 물길 옆으로 단정한 돌길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휠체어를 끌어야 하는 우리들에겐 오히려 고역이었다. 납작 복숭아 1(엄마)을 태우고 휠체어를 끌던 납작 복숭아 2(남편)는 운하 초입부에서 멈춰 섰다. 엄마도 "걷기도 해야지. 운동 삼아." 하면서 눈치껏 일어나 지팡이를 짚어가며 운하 옆을 걸었다. 잠깐 동안이지만 르타오에서 산 휘낭시에 선물세트와 기념품이 엄마 대신 휠체어 위를 차지했다. 사람이 아닌 물건을 끌며 운하를 산책하는 납작 복숭아 2의 얼굴 표정이 오묘했다.


운하 옆에 자리한 창고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물 보관소였던 곳은 이제 각종 상점이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정직하게 그려내던 집 모양을 꼭 닮은 창고들의 행렬을 보고 있으니 어째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번엔 <러브레터>가 아니었다.


준경(-남편의 이름), 이 운하 보니까 <포르코 로쏘(붉은 돼지)> 생각나지 않아?

그러네. 비행기 수리해서 도주하듯이 날아가던 그 장면.

맞아, 그 장면!


<러브레터>의 고장에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당일치기 여행을 슬슬 마무리 짓는 우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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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루 운하의 모습. 나란히 걷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언제 봐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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