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당신.
새 집을 샀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시작이다...
이 집을 구매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모으고, 계산하고, 다시 모으고.
계획을 세우고, 무너지고, 또 세우기를 반복.
한때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어느 날 가능해졌다.
마침내 계약서를 쓰고 나니, 이제는 모든 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진짜 끝이라고, 드디어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산을 넘었더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집주인이라는 이름의 산이었다.
새 집으로 이사 가려면, 지금 살고 있는 집 계약을 일찍 끝내야 했다.
이미 계약 파기를 공식적으로 요청을 했고, 그에 따른 페널티도 다 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짐만 싸는 되는 일처럼 들린다.
하지만 영국의 렌트 시스템은 늘 한 단계 더 복잡하다.
페널티를 내도 새 세입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새 세입자를 막고 있는 사람은 다른 아닌, 우리 집주인이다.
며칠 전 부동산 사이트를 열었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새 리스팅을 봤다.
구조도, 사진도, 거실 조명 각도까지 똑같았다.
달라진 건 단 하나, 월세였다.
우리가 내는 금액보다 더 높게,
그리고 이 동네 단독주택보다도 더 비싸게 올라와 있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집은 단독주택이 아닌, Terraced 하우스다.
2,3세대가 붙어 있는 구조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간에 붙어 있는 집이라
상대적으로 단독주택이나, 끝에 붙어 있는 집들보다 선호도가 적다.
안 그래도 선호도가 적은데 단독주택 월세보다 비싸다니...
금세 알았다.
'이건 나가지 말라는 신호구나.'
사실 이번 재 계약을 할 때, 이미 전달은 했었다.
"중간에 나가야 할 수도 있다"라고.
그때 집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괜찮지! 언제든 2달 전에만 말해줘!"라고.
우리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괜찮다'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부동산에서도 인정했다.
"집주인이 당신들이 너무 깔끔하게 살아서 보내기 싫은가 봐요.
한 달에 한 번 점검용 사진을 받을 때마다, 꼭 우리한테 자랑해요.
세입자들이 신발도 벗고 생활하고, 정원도 관리하며 월세도 꼬박꼬박 잘 낸다고요.
자기는 '럭키 한 집주인' 이라고요."
처음엔 웃겼다.
'착하게 살아서 보내기 아까운 세입자'가 됐다니.
하지만 그 말에는 나름의 현실이 있었다.
요즘 영국에서는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의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월세를 몇 달씩 밀리고, 나가라는 통보에도 버티는 사람들.
심지어 월세를 미룰 대로 미루다가 자기네 나라로 도망가버리거나,
이번에 남편 지인은 세입자와 다퉜는데 어느 날 방화를 저질렀다고 한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성실했다.
월세는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 집은 신발 벗고 살 만큼 깨끗했다.
그러니 집주인 입장에서는 이런 세입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해는 된다.
우리를 여름까지 잡고 있다가 여름에 세입자들이 유동적으로 움직일 때,
월세를 조금이라도 더 높게 받고 싶겠지.
하지만 이해와 억압은 다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시스템은 이상하다.
우리가 계약을 일찍 끝내니까 페널티를 받는다.
그래, 규정이 그렇다니 그건 알겠다.
그런데 문제는, 페널티를 내고도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라면서,
왜 페널티는 페널티대로 받고, 우리는 여전히 묶어두는 걸까?
더 웃긴 건, 거기에 복비까지 우리가 낸다는 사실이다.
새 세입자를 찾기 위한 광고비라는데, 그걸 왜 우리가 내는 걸까?
우리가 이미 '나가겠다고' 말하고 페널티도 냈으면,
이제부턴 집주인과 부동산의 일 아닌가?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가려면 벌금 내고, 기다리면서 광고비도 내고,
그동안은 계속 월세도 내야 한다.
영국식 렌트는 완벽하다.
세입자는 나가도 돈을 내고, 있어도 돈을 낸다.
이쯤 되면 집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의 실험실이다.
"돈이 움직이지 않아도 세입자만으로 현금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아주 훌륭한 사회 실험.
한때는 돈이 문제였고, 그다음엔 서류가 문제였는데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다.
영국에서 집을 산다는 건, 결국 끝없는 관계의 미로를 통과하는 일 같다.
그 미로의 마지막 문 앞에서, 또 한 번 이런 말을 듣는다.
"I'm afraid, you can't leave yet."
(죄송하지만, 자유는 아직 승인이 안 됐어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번엔 집주인이 그 마지막 산이었다.
새 집 열쇠는 벌써 내 손에 있는데,
여전히 이 집의 열쇠는 못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