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명옥헌鳴玉軒
하나의 장면을 갖기 위한 예
봉준호는 영화 ‘마더'에서 그룹의 엄마들이 미친 듯이 고속버스에서 춤을 추는 엔딩을 두고 18, 19년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장면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2시간짜리 영화는 이 하나의 장면을 찍기 위한 핑계였다고...
어릴 적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버스가 실룩 거리는 것을 보고 '저게 뭐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후 실룩 거리는 버스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오대산 국립공원 주차장에서였다고 한다.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내리지 않고 흥을 주체 못 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고, 아주머니들이 대체 왜 달리는 버스에서 몸부림을 추면서 놀아야 하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으며, 영화 마더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라고 말한다.
이미 시놉시스에도 등장했던 이 장면을 찍기 위해선 제약 조건이 많았다. 태양이 버스를 수직으로 관통해야 하고 이것을 달리는 차에서 찍어야 했다. 주변에 건물도 사람도 없는 일직선의 도로는 남북방향이어야만 했고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인천공항 근처 도로에서 찾았다. 태양과 고속버스 그리고 카메라가 모두 일직선인 기회는 하루에 2번뿐, 아침과 해질 때 30분씩이며 계절에 따른 태양의 각도를 계산한 결과 1월 7일이 나왔다.
햇빛이 관통하는 관광버스에서 홀로 멍하니 앉아 있던 김혜자는 자기 허벅지에 침을 놓고는 춤추는 무리들 사이로 몸을 섞는다. 뒤에서 비추는 햇빛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뒤흔드는 몸짓으로 출렁이는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춤을 추어야 살아갈 수 있는 엄마의 삶을 연출한 이 장면은 가장 오랫동안 준비한 장면임에도 가장 짧은 촬영시간 안에 찍어야 했으며, 가장 철저하게 준비한 촬영임에도 역설적으로 우연이 뒤범벅된 장면이었다.
정원도 결국은 갖고 싶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조성하는 것이다. 원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정원은 지형과 동선을 사용한다. 영화가 카메라를 통해 통제된 시선으로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듯, 정원은 지형과 동선, 그 밖의 것들로 시선을 통제하여 메시지를 전한다.
지형과 동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하나의 장면을 연출한 정원이 있으니, 담양의 명옥헌이다. 정원 조성을 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정원에 가서 지형과 동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선의 조임과 열림, 앙각과 부감을 지형과 동선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연출하여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게 한 놀라운 정원이다.
옆으로 긴 지당은 건물 쪽으로 면한 곳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이다. 평면도로 봐서 그렇지 건물에서 가까울수록 지당이 넓어지고 멀어질수록 반대라는 것을 지당 옆을 따라 걸으며 실감하기는 힘들다. 400년 된 배롱나무 길은 하나의 터널이다. 단일 수종으로 열식한 길은 훌륭한 산책로가 된다. 양버즘나무길, 벚나무길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주 경험하지만 배롱나무 길은 생경하다. 배롱나무는 수고가 낮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선의 일부를 차단한다. 조여진 시선은 위요감을 갖게 하여 자연으로 가득 찬 길 만끽하게 해 주고, 이후의 해방감을 극대화시킨다. 산책로 끝의 경사지 위에는 명옥헌이 있다. 자연스레 앙각으로 변한 시선은 권위, 위엄, 존경심을 느끼게 한다. 흐르는 계류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언덕을 오르면 난간 있는 정자 명옥헌 앞이다. 근처에 있는 정자인 소쇄원의 광풍각이나 환벽당에는 난간이 없다. 난간이 없는 정자는 어디든 걸터앉을 수 있으며 어디로든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반면 명옥헌은 오직 정자의 앞과 뒤의 중앙만 뚫려 있으며 진입은 뒤로만 가능하도록 동선을 유도한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숙여 방으로 들어간다. 숙였던 고개를 들면 명옥헌이 준비한 '단 하나의 장면'이 펼쳐진다.
방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은 영화의 스크린을 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정원의 모습은 새로운 것이 아닌 방금 지나쳐온 것들이다. 하나의 장면으로 짜 맞춰진 지형과 동선, 그리고 나무와 물은 새로운 경관을 만들었다. 일직선이었다면 겹쳐서 보였을 배롱나무들이 점점 좁아지는 지안 양 옆으로 열 지어있기 때문에 화면의 배경이 된다. 배롱나무의 가지가 물에 비취고 하늘의 구름은 물에 담긴다. 정자에 앉으니 시선이 저절로 아래 있는 물을 향한다. 야트마한 언덕이 주는 시선의 떨굼은 사람을 사색에 빠지게 한다.
인트로에서 클라이맥스 그리고 엔딩까지 이어지는 영화의 흐름이 잘 발전되는지에 따라 관객은 감독이 원하는 호흡에 맞춰 감상하고, 이해한다. 그러한 점에서 명옥헌은 시퀀스sequence가 좋은 정원으로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단편영화 같다. 누구든 명옥헌에서 생각에 잠긴다. 자연을 비추던 물 위로 어떤 생각을 떠올리든 물은 어느새 내 마음을 비춘다.
몇 백 년 동안 유지된 정원이 남긴 하나의 장면은 매 순간 변화한다. 계절, 시간, 날씨, 그리고 마음에 따라 변하는 정원은 항상 우연의 뒤범벅이다. 잠잠하던 물 위로 비가 내린다. 400년 된 배롱나무 수피를 따라 흐르는 빗물은 근육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 같아 보인다. 젖어드는 나무의 아름다움에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본 글에서 영화 '마더'와 관련된 내용은 봉준호 감독의 KAFA(한국영화아카데미) 인터뷰 영상의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