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강진 다산초당多山草堂
왕의 정원 부용지와 유배지의 정원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 백성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졌던 두 리더의 정원이다. 화려함과 초라함의 차이는 한양과 강진이라는 거리만큼이나 컸지만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같은 마음으로 지어진 닮은 정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열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했던, 두 리더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정조는 왕이 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위협을 겪었다. 정치 방해공작과 실제로 그를 해치려는 여러 시도들 속에서 정조는 더욱 강한 왕이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세손 시절부터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이 너무 많아 개인 도서관인 열고관과 개유와를 지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던 정조는 한 번씩 지칠 때면 도서관 아래의 연못을 보며 왕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위협으로부터 지키면서, 함께 훌륭한 정책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던 정조는 자신의 눈앞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1776년, 왕으로 즉위한 정조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건립을 선포한다. 세손 시절에도 도서관을 지었었고, 왕이 도서관을 짓겠다고 하는 것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에 일은 탈없이 진행된다. 규장각 건립은 단순히 도서관만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를 조성하는 대대적인 공사로 변모한다. 규장각 아래의 연못에는 섬과 부용정을, 규장각 위로는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주합루를 짓는다. 5년에 걸친 대공사가 끝나자 도서관을 지은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초계문신제도'의 거행이었다. 만 37세 이하의 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규장각에 위탁해 교육을 받게 하는 제도인 '초계문신제도'의 실상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젊은 학자들을 모아 노론을 대적할 정조의 세력을 꾸리기 위해서였다.
정조의 아지트가 완성되었다. 정조의 아지트는 자신의 사람이 된 이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과 정조의 권위를 드 높이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 지형을 지혜롭게 활용하였다. 언덕 위의 규장각과 주합루는 하나의 건축물로 1층 도서관과 2층 전망대의 이름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주합루로 올라서 왕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것은 초계문신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주합루에 올라선 초계문신은 아마도 왕의 든든한 지원을 느끼며 동시에 사명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동그란 섬과 네모난 못에 발을 담근듯한 부용정은 연꽃이 핀 모양의 건축물이다. 부용정을 자세히 보면 물에 두 기둥을 받치고 있는 방은 다른 곳보다 한 단 높고 창호도 화려하다. 이곳에 앉아 있는 왕을 앞에서 알현하면 마치 물에 떠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왕의 존재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어수문, 규장각 그리고 주합루는 왕의 권위와 권력을 축선을 통해 강렬하게 느껴지게 하는 구도이다.
주합루에서 시작된 강한 축선은 부용정에서 끝나지 않고 열고관과 개유와로 이어진다. 세손 시절,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고 생각해 낸 곳이다. 정조는 주합루 맞은편, 열고관과 개유와를 바라보며 홀로였던 지난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유능한 신하들과 함께다. 힘들고 지칠 때면 주합루에 올라 자신이 완성한 정원과 맞은편 세손 시절 도서관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을 정조를 그려본다.
규장각 완성 20주년이었던 1800년,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죽는다. 20년 동안 일궈놓은 성과들이 하나씩 해체된다. 정조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처단이 시작된다. 정조가 누구보다 지키고 싶었던 사람, 정조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한 사람, 강진의 다산초당은 바로 정약용의 유배지이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는다. 다산초당에서의 12년은 정약용에게 500여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게 했다.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를 꿈꾸며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다. 정조와 함께 나누었던 꿈이다. 부용지 주변을 거닐고, 주합루 아래를 내려다보며 함께 나눴던 대화다. 왕은 없고 그는 유배 신세지만 책으로 남긴다면, 누군가 읽고 언젠가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다.
다산초당은 산 중턱에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곳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유배지에 어울리지 않게 연못이 있다. 연못을 만드는 것은 품이 많이 들어 부유한 집에서도 쉽게 조성하지 못한다. 지금도 잉어가 살고 있는 연못은 정약용이 다산 4 경이라 부르며 아끼던 공간이다. 정약용은 초당을 비울 때면 잉어의 안부를 물었고, 잉어가 헤엄치는 모습만 보고도 날씨를 예상할 정도로 자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정약용이 초계문신이던 시절 부용지에서의 일을 기록한 글이 있다. 정조는 종종 부용정에 앉아 문신들에게 즉흥시를 짓게 했는데 이때 시를 완성하지 못한 이는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유배 보내졌다고 한다. 시 짓기에는 자신 있었지만 부용지에서 잉어를 잡는 낚시 대회가 열리면 거의 대부분 유배를 당하곤 했다고 정약용은 기록한다.
잉어를 바라보며 부용지에서의 추억들이 떠올라 미소 짓었을 정약용을 상상해 본다. 초당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저술 작업에 몰두하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지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정조가 부용지를 만들고 함께 할 이들을 모았듯이, 정약용은 다산초당에 지당을 만들고 제자들과 함께 수 백 권의 책을 써낸다. 정조가 남모르게 정원에서 마음을 달랬듯이, 정약용 역시 연못을 보며 힘든 유배지에서의 세월을 견뎌낸다. 규장각의 책으로 공부했던 초계문신 정약용은 이제 규장각 서고에 꼽힐만한 책을 수 백권 발간하였다. 부용지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다산초당에서 함께 잉어가 노니는 것을 보며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