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우리 정원 이야기_백악춘효도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폐허였던 경복궁이 오늘날 월대 복원 행사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그림 속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었던 궁의 모습을 18세기 초에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270여 년 동안 폐허였던 경복궁이 복원된 것은 고종 때였다. 하지만 복원된 지 겨우 50년 만인 1915년부터 자행된 일제의 경복궁 훼손의 절차들은 너무도 잔인하였다. 칼날의 깊이가 너무도 깊어 해방된 지 8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온전한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월대까지 복원된 늠름한 광화문을 보니 본래의 기능을 되찾은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광화문의 의미를 되짚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복궁을 복원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든 것을 조선시대 그대로 되돌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과밀화된 서울의 중심부의 조직된 교통망 체계를 조선시대로 돌려놓을 순 없다. 만약 일제 때 광화문 앞에서 창덕궁 돈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 일대는 어떻게 발전하고, 교통 체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미 체계가 잡힌 도로망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창경궁-종묘 사잇길 지하화 사업'이 어렵게 단행되어 완공되었다면, 이제 '광화문대로 지하화 사업'이 그다음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경궁과 종묘 사잇길은 광화문 앞에서 창덕궁 돈화문으로 이어지는 길과 연결된다. 일제가 법궁 바로 앞에서 시작해 이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이 길을 만든 이유는 조선의 정기를 끊어내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정기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왕이 정치를 할 때 앉는 자리 뒤에는 일월오봉도가 있다. 그림의 다섯 산은 한반도의 동서남북과 중앙의 산인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삼각산(북한산)을 상징한다. 북악산이 받은 북한산의 정기는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종묘로 흐른다. 경복궁으로 흐른 산의 기운은 왕의 침소인 강녕전, 왕과 신하가 함께 정치를 하는 사정전과 근정전으로 흘러 마침내 광화문을 지나 육조거리를 거쳐 관악산으로 향한다. 남북으로 강하게 뻗은 경복궁 중심축은 뒤로는 북한산과 북악산을, 앞으로는 관악산을 향하는 산의 기운, 바로 조선의 정기이다.
조선신궁과 조선총독부는 1925,6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다. 이때 국가 주요 기관들이 있었던 육조거리를 함께 확장하여 지금의 광화문 대로의 골격이 완성된다. 광화문을 헐고 근정전 앞을 모조리 밀어낸 후 조성된 조선총독부는 근정전 앞에서 경복궁과 축을 미묘하게 달리한다. 조선총독부는 확장된 육조거리와 이어져 남산에 지어진 조선신궁을 향해 뻗는다. 그래서 관악산으로 뻗어나가는 조선의 정기를 목줄로 잡아당겨 억지로 일제의 천황에게 절을 하는 형상을 띄게 한다.
해방 후 육조거리의 향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박정희 시대의 역사학자들과 많은 지식인들이 광화문 대로의 향을 원래대로 바꿔놓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을 광화문대로 앞에 두어 일본의 기운을 잠재우겠다며 동상을 설치한다. 동상 설치로 잠재워진 일본의 기운을 뒤로 한채 광화문대로는 점차 확장된다. 하지만 기본 골격은 뒤틀린 그대로다. 바로잡지 못한 역사가 시간이 흐르자 되돌리기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돌아가셔서까지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순신 동상에게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든다.
갑자기 광화문을 밀어버리고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만들었다면 반발이 심했을 것이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설 10년 전인 1915년에 식민통치의 성과를 전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 전시회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이 이때 사라졌고, 이후 전시관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놓이는 수순으로 일이 진행된다. 다행히 안중식의 백악춘효도는 조선물산공진회 준비로 경복궁이 훼손되기 직전에 그려져서 경복궁의 원래의 모습을 남겼다. 이번에 복원된 광화문 앞 월대의 모습과 해태상을 볼 수 있는 안중식의 그림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광화문 뒤 울창한 수목들이다. 지금의 광화문 뒤, 매표소 일대는 모래바람이 부는 광장이다. 경복궁은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곳이라 매표소 앞에 넓은 광장이 필요하겠지만 휑한 광장에 부는 먼지바람과 그늘 하나 없이 뙤약볕에서 괴로워하는 관람객들을 보고 있자면 백악춘효도가 떠오른다.
만약 조선총독부를 만드느라 광화문 뒤의 울창한 수목들이 모조리 잘려나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조선의 정기를 끊어내겠다고 광화문에서 돈화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경복궁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권을 살 때 광화문 뒤가 아닌 앞에 있는 매표소를 이용했을 것이고, 입장권 제시 후 위풍당당한 광화문을 지나 노거수들이 울창한 경복궁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을 것이고, 경복궁의 위용은 지금보다 드높았을 것이다.
광화문 월대 복원은 단순히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서 오래전 잘려나간 나라의 위상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아쉽게도 우린 경복궁으로 들어갈 때 웅장한 정문을 보며 들어갈 수 없지만 왜 우리가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는지, 원래 광화문 뒤에 펼쳐지는 경복궁의 풍경은 어떠했었는지, 기억하고 상상해 본다면 오늘날 월대가 복원된 것처럼 언젠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훼손된 기운을 온전하게 되살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북한산에서부터 흘러내린 정기가 마침내 관악산을 향해 뻗어나가는 날이 오면, 광야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목놓아 부르던 초인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