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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Oct 11. 2023

한국인을 상징하는 나무의 자리

사계절 따라 떠나는 정원_봄

뼈대를 보이던 겨울의 나뭇가지들 사이로 초록의 이파리들이 돋아나면 새로 태어난 자연을 만끽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매년 겪는 봄이지만 새로 태어나는 식물들에게 반갑다는 말을 입으로든 눈으로든 해줘야 할 것 같다. 이러한 반가움은 4월이면 흩날리는 벚꽃에게 특히 더하다. 벚꽃과 더불어 봄이면 개나리, 목련, 진달래와 철쭉이 어디든 한가득인데 조선시대에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던 봄의 색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촌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꽃이 아닌 본래 우리가 즐겼던 소박한 꽃과 나무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가보자.


매화


조선시대 봄을 상징하는 나무는 단연 매화이다. 매실이 맺히기 전에 피는 아름다운 꽃은 잎 없이 먼저 피어 봄이 왔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 경복궁 자경전의 담에는 계절을 상징하는 꽃과 나무들이 그림처럼 걸려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매화도이다.


자경전 꽃담 매화도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86433#home)


구불구불한 매화의 나뭇가지에 동그란 새순이 달려있다. 그중 하나의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 있고, 그 안에는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다. 많은 선비들이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 창문을 열고 매화나무 가지에 달이 걸린 모습을 감상하고자 했다. 둥그런 달과 구불구불한 나뭇가지 그리고 막 피려고 부푼 이파리 없는 꽃망울은 오랫동안 지속된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수많은 김환기의 [달 항아리와, 매화]의 연작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가지’(1958년) 출처: (좌)https://www.shinsegaegroupnew (우)https://m.segye.com/view/20090119003
(좌)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년작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우) 항아리와 매화, 1954 shinsegaegroupnewsroom



한국인을 상징하는 나무 자리는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많은 곳의 조경수와 상징수로 사용된다. 소나무는 십장생이기도 하고, 사시사철 푸르르고 오래 살기 때문에 변치 않는 모습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여 나무의 품계 중 최상인 1품*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한국적인 나무는 매화이다. 한국인들은 나무의 자연스러운 구불구불함을 좋아하는데 소나무 기둥의 웅장한 구불구불함도 좋지만, 작고 동그란 꽃망울을 매달고 한마디 한마디 세월의 역경을 견뎌가며 자라난 매화의 나뭇가지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지키며 한평생을 올곧게 살아낸 노인의 정감 있는 주름살을 보는 것 같다.

*조선시대 원예서적인 화암수록에는 화목구등품제가 있는데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 연꽃이 1품이다.




소쇄원 가장 높은 곳에는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霽月堂이 있다. 건물 옆에 매화나무를 심어놓아 매대梅臺라 불리는 화계는 요월邀月 즉, 달맞이를 위한 장소이다. 제월당에 앉아 매화와 함께 달을 기다렸을 주인이 그려진다.


도산서원 매화나무 (출처:http://www.ttearth.com/world/asia/korea/andong/dosan_seoweon.htm)


매화를 아꼈던 수많은 선비들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매화시를 남긴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은 유명하다. [매화시첩]은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자작, 자필, 단일소재의 단행본 시집이다.* 향년 70세로 별세하신 날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산서당 앞에는 절우사節友社라는 작은 정원이 있는데 매송국죽梅松菊竹을 심어 놓고 서당에 앉아 즐기셨다. 지금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퇴계 이황의 위상을 살리지 못하지만, 언젠가 안동에서 퇴계 이황이 아끼셨던 정원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래의 모습으로 관리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홍우흠. 1983. [퇴계의 매화시첩에 대한 연구]. 인문연구 4.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p89


도산서당 절우사



복숭아와 살구나무 


정선의 필운대상춘과 임득명의 등고상화


매화와 함께 조선에 봄을 알렸던 나무는 도화와 행화이다. 한 그루 심어놓고 홀로 고요히 앉아 작품처럼 감상했던 매화와 달리, 복숭아와 살구나무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봄꽃놀이를 즐기던 명소로 유명했다. 정선의 [필운대상춘]과 임득명의 [등고상화]는 인왕산으로 꽃놀이하러 모여드는 한양도성 사람들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인왕산 자락에는 살구나무 꽃들이 가득 폈다면, 성북동은 도화동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복숭아나무가 가득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에 마음이 홀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한양도성도, 호암미술관


한양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 모든 물이 모여 흘러 나갔던 흥인지문 주변으로는 연둣빛의 버드나무 새순이 얇게 늘어진 나뭇가지들에 잔잔히 피어났다. 지금은 흥인지문 주변으로 버드나무 군락을 볼 수는 없지만 경복궁 경회루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 있어 봄의 운치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정선,〈경복궁〉, 비단에 엷은 채색, 16.7×18.1cm, 고려대학교박물관


경복궁 경회루 지원은 원래 습지였던 지대가 주변 건축물을 상하게 하자 이를 개선하려고 만든 정원이다.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는 원래부터 경회루 주변에 심겨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된 경복궁을 그린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도 경회루의 기둥만 남은 모습과 방지 그리고 주변의 버드나무를 볼 수 있다.


경복궁에는 경회루의 버드나무 군락 말고도 봄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경관이 있다. 경복궁의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5월 중 어느 며칠만 교태전의 뒷문이 모두 열려 3폭의 그림처럼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 허락된다. 교태전 아미산 화계에는 매화와 모란 같은 나무도 있지만, 특별히 신경 써서 사치스럽지 않고 소박한 봄 꽃, 바위취, 씀바귀, 은방울, 앵두, 매발톱, 붓꽃 등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아미산 화계(출처: 문화재청)


봄에 가장 아름다운 한국 정원을 꼽으라면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를 추천한다. 5월의 어느 평일, 오전 일찍 부지런히 걸어 교태전 뒤에 다 달으면 고요하고, 한적하게 오래도록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왕비의 시선으로 교태전 대청마루에 앉아 세 폭의 그림으로 정원을 눈에 담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가 산책하며 정원의 꽃과 나무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굴뚝의 장식까지 즐기고 나면 새로 온 봄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충분히 해준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아미산화계 를 검색하시면 양인억(@InEok_Yang)님의 아름다운 초화류 사진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Instagram의 InEok Yang님: “간밤의 비로 생기 넘치는 왕비의 정원, 아미산 화계 ❗️오늘 마지막 포스팅은 꽃 대신 새벽의 비를 머금고 있는 화계 식물들 그리고 예쁜 꽃이 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큼직한(?) 열매를 달고 있는 앵두입니다. #경복궁 #궁궐 #고궁 #서울…”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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