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청과 국가유산청에서 봤으면 혹은 보지 않았으면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조직을 개편하며 전통조경계가 확장되었다. 산림청에서 국가정원이라는 키워드로 산림에서 정원으로의 전환을 성공시킨 것에 국가유산청에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전까지 찬밥신세였던 조경은 관심받지 못하던 부모에게 늦게나마 애정을 확인하듯이 조직과 학계, 기업이 긴밀하게 협업을 준비 중이다. 산림청에서 ‘한국 정원’ 또는 ‘K-garden’의 정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여러 학술 용역으로 연구를 해왔지만 정확한 디자인적 정의나 요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역시나 ‘한국 정원'이라는 키워드를 놓칠 수 없는 문화재청 역시 ‘대한민국 전통조경대전'이라는 공모전을 통해 ‘전통조경 보존관리 활용의 기본계획' 중에 하나인 ‘한국 전통정원 보급모델 개발'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정원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러 다니면 ‘한국에도 정원이 있냐?’는 이야기를 듣던 나에게는 국가기관 혹은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정원'과 관련된 모든 사업들이 질과 방향성을 떠나서 반갑고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부터 어떻게 잘하겠냐'는 생각과, '뭐라도 하는 게 고맙다'는 생각이,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하던 지난날과 비교했을 때 감사하게 느껴지는 마음이 컸다. 조경가가 현대미술관에서 작가로 초청되고, 가장 인기 있는 대중매체이자 연예인인 유재석의 유퀴즈에서 ‘정영선'과 ‘조경가'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것은 아마 앞으로 진행될 ‘정원', ‘조경', ‘경관'에 대한 담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관심 있게 다뤄지게 될 것의 예고일 것이다.
산림청이 얼마나 전략적으로 훌륭히 사업을 수행하며, 속도가 빠르고, 장애나 구속 없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뤄나가는지 감탄스럽다. ‘정원'을 사업으로 보는 산림청의 종착점이 국토의 정원을 테마파크화 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걱정스럽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정원사업을 추진하는 정부기관의 방향성은 지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비슷한 수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정원'의 키워드를 결코 뺏길 수 없는 국가유산청에서는 ‘대한민국 전통조경대전'을 개최하였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경학회가 전통과 현대로 구분되어 있는 나라인 것도 한스러운데, 조경대전마저 ‘조경대전’과 ‘전통조경대전'으로 나뉘게 된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물론 국가에서 ‘전통조경'이라는 키워드로 무엇을 하려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가움도 있지만 ‘전통조경'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어떤 한계점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산림청이나 국가유산청이나 모두 국가 기관에서 ‘한국형 모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 답을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하다. 그 어떠한 예술도 이런 식으로 양식이 규정되거나 창조된 적은 없다. 사업을 키워야겠다는 국가적 의지는 반가운 일이지만 그 방식면에서는 무척 폭력적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부모 같다. 국가에서 정말 이 분야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장'을 만드는 일이다. 담론을 공유하는 장, 디자이너들이 서로 경쟁하는 장, 비평과 토론이 난무하며 서로를 비판하기도 추앙하기도 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국가가 아무리 나서서 사업을 하려고 하더라도 수준과 질은 낮을 수밖에 없고,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K-pop이 잘되니 국가가 나서서 아이돌을 양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비'가 없는 21세기에 ‘디지털로 만나는 선비의 이상향'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렇게도 집요하게 국가가 나서서 현대와 과거를 분리시키려고 하는데 과거를 잇는 현대적 한국성이라는 것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3일에 열린 현대미술관 학술대회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에서 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님은 ‘전통의 형식적 재생산과 공간 작명에 그치는 예스러운 것'을 지적하며 ‘조형요소가 아닌 경험과 기억의 원형으로서 한국성'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물리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한국성을 물리적인 요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초가나 기와지붕에 살지 않고 아파트에 살며, 말이 아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이 시대의 한국성은 한국성이 아니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로 이어지는 선상에 있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관념 속에서는 미래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