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지 말아야 할 경복궁의 장면들
경복궁을 걷다 보면 생각보다 광활한 크기에 사람들은 금방 지친다. 비슷해 보이는 전각들이 연속된 곳을 걷다 보면 방향감각이 희미해진다. 그럴 때 기준으로 삼으면 좋은 것이 북악산이다. 경복궁은 북악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을 향해 전각들이 일렬종대로 줄을 서 있는 구조이다. 북악산을 기준으로 계속 가다 보면 어느새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파는 경회루를 구경하고 경복궁 감상을 마친다. 더 뒤로 가다간 여정이 얼마나 길어질지 가늠이 안되기 때문에 살짝 겁이 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나가기에 궁은 뒤쪽으로 갈수록 예뻐지니, 주저 말고 뒤로 뒤로 향해야 한다
경복궁에는 후원과 상원이 있다. 후원의 대표 격은 향원지香遠池이고, 상원의 대표 격은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이다. 상원은 현재 청와대 권역이다. 고종이 만든 향원지는 궁 안에 또 다른 궁인 건청궁과 짝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업무를 보는 편전과 생활을 하는 침전을 하나로 합쳐 사용하였다. 그래서 건청궁의 집무실은 고택의 사랑채 형태이다. 누마루에서는 업무를, 침소에서는 휴식을 취하여 이동을 최소화했다. 건청궁 바로 앞에 있는 향원지는 최소한으로만 이동하면서도 왕다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든 정원이다. 경복궁 뒤 깊숙한 곳에 이런 정원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향원지에는 가운데 둥근 섬으로 향하는 현대식 하얀 철제 다리가 있다. 문화유산과 어울리지 않는 재료와 색감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복원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고종은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왕이었다. 그는 특히 현대식 다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향원지의 취향교는 그가 만들었던 다리 중 유일하게 복원된 것이다. 덕수궁과 궐외각사를 연결하던 다리와, 창덕궁 존덕지의 다리는 흔적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고종이 만든 3개의 다리는 여러 선교사와 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서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얀색 철제 다리와 2층의 육각정자는 고종이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만든 보이는 요소라면 향원지의 한쪽 귀퉁이의 샘은 이름에서부터 정치적 의도가 느껴진다. 열상진원洌上眞源이란 이름의 샘은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뜻이다.(출처: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문화재청, 2007, 253쪽.) 맑은 물이라는 뜻의 열수洌水는 한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 한강의 근원이 바로 이 샘이라는 것은 한양의 근원이 바로 이곳이며, 조선의 근본이 고종 자신이라는 것을 상징하고자 하는 의도를 짐작해보게 한다.
거창한 이름처럼 열상진원의 샘물이 향원지로 흘러드는 과정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곳만의 특별한 구성이다. 동그랗게 판 석구로 물이 들어와 휘돌아 감긴 다음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다시 물줄기를 볼 수 없게 된다. 커다란 석판을 통과한 물은 어느새 향원지의 수위와 같게 내려와 고요히 퍼져나간다. 이렇게 세심하게 여러 과정을 거쳐 입수시설을 만든 이유는 아름다운 정자와 다리 때문이다. 샘에서부터 진입과정 없이 바로 못으로 입수된다면 물에 파장이 생겨 정자와 다리를 비춰볼 수 없다. 물이 잔잔히 들어오고 바람 없이 맑은 날에 아름다운 정자와 다리를 물에 비춰볼 수 있다. 지당 조성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거울과 같이 투영된 조형물을 감상하는 것이다. 티브이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아름다운 건축물과 다리를 물에 비추어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을 것이다.
경복궁의 건청궁까지 오면 북문인 신무문으로 나가 청와대를 볼 수 있다. 경복궁과 청와대 사이를 지나는 차도는 원래 없던 길이다. 지금은 담장으로 나눠져 있지만 북악산 바로 아래, 지금의 청와대 구역인 상원과 교태전을 기준으로 뒷 공간인 후원, 그리고 중심 전각들까지 모두 하나의 공간이었다. 북악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경복궁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중간에 도로를 놓아 그 흐름을 끊은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었다. 청와대 권역이라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천하제일복지 일대의 정원은 도면으로만 확인 가능하다. 천하제일복지 일대를 연구하신 박사님과 함께 청와대가 개방되자마자 실제 공간을 찾아보려고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천하제일복지라는 바위에 새겨진 각자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명당이라는 뜻의 각자는 그러한 명당에 위치한 궁이기에 나라가 번성하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특이한 형태의 돌로 만든 물길과 정원 주변의 건축물들의 위치를 가늠해 보며 언젠가 발굴되기를 기대해 보았다.
상원과 후원을 지나 북악산의 정기가 마지막까지 흐르는 곳에 다다르면 경복궁의 또 다른 정원이 등장한다. 바로 아미산 화계이다. 아미산 화계는 교태전 뒤에 있는 정원으로 왕비의 정원이라 불린다. 경복궁에 왕비의 정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북적이는 경회루와 달리 작고 아담한 이곳에 오면 때때로 단체 관광객이 몰려왔다가 지나가지만, 꽤나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경복궁에 올 때면 아침 일찍 오려고 노력한다. 첫 수문장 교대의식이 끝나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수수 경복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을 지나 교태전에 다다르면 아침의 햇살을 머금은 고요한 화계를 감상할 수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굴뚝과 해시계를 놓던 앙부일구대, 그리고 연꽃문양의 수조와 사람 얼굴을 닮은 것 같은 괴석까지 수 많은 장식물들 사이에서 유독 마음이 가는 것은 함월지涵月池와 낙하담落霞潭이다. 별다른 장식 없이 이름만 덩그러니 새겨진 함월지와 낙하담은 그 이름을 곰곰이 되뇌어 보면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아린다.
저녁 무렵, 화계를 산책하는 왕비는 노을이 물든 웅덩이란 뜻의 수조에 담아낸 하늘의 색을 바라보며 흡족했을까? 아니면 노을빛이 아름다울수록 가슴이 먹먹해지고 쓸쓸해지는 기분을 느꼈을까? 달을 품은 연못을 보며 모두들 우러러보는 달이지만 영락없이 작은 못에 갇힌 신세가 자신과 같다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진 않았을지 상상해 본다.
지금은 덩그러니 남은 둔덕과 같은 화계이지만, 본래는 북악산의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 있었다. 경복궁전도에도 등장하는 4갈래의 파란 줄기는 북악산 산줄기를 뜻한다. 교태전 바로 뒤까지 뻗어있는 가장 두꺼운 줄기는 아미산 화계가 북악산 정기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회루의 못을 만들기 위해 퍼낸 흙을 교태전 뒤에 쌓아뒀던 것이 지금의 화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것으로 바로 잡아지길 바란다. 이런 근거 없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아미산 화계 뒷부분의 줄기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교태전 바로 뒤에 일본식 정원이 만들어졌다. 창경원을 만든 것처럼 일제는 경복궁도 공원화하였다. 볼거리가 없다며, 구경거리를 빙자한 교태전 뒤의 일본식 정원은 북악산의 줄기를 없애서 아미산 화계가 덩그러니 남은 둔덕처럼 보이게 하였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아미산화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북악산의 산줄기를 깔끔하게 제거해 버렸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아미산화계가 북악산 정기였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태전에서 광화문까지 일직선 축선상에 놓인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근원이 북악산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월오봉도의 중앙의 높이 솟은 산은 북한산인 삼각산이고, 북한산의 산줄기를 이어받은 것이 바로 북악산이다. 북한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중심 산의 기운이 아미산 화계로 전해져 중심전각들을 지나 광화문을 통과해 조선 전체로 뻗어나간다. 산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던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아미산 화계 옆문으로 나가기 전 뒤를 돌아 다시 한번 화계를 바라보는 것을 추천한다. 건순각 옆에 있는 단 위에 오르면, 아미산 화계에 있는 4개의 굴뚝이 일직선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놓여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교태전 대청마루에 앉아 배경처럼 존재하는 화계뿐 아니라 건순각에서 입체감 있게 감상하는 화계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실제로 이 화계를 감상했을 정원의 주인과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정원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기 때문에 나가기 전, 꼭 한번 뒤를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교태전 아미산 화계에서 밖으로 나오면 탁 트인 개방감이 느껴진다. 왕비의 정원이라고 하지만 여성의 공간은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 중심전각들이 가지고 있는 위엄 있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한가한 나무들과 쉴 수 있는 의자가 반갑다. 교태전을 향해 잠시 등을 돌리고 앉으면 그림들이 보인다.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8개의 그림은 ‘자경전 꽃담’이라 불리는 그림이다. 나는 이것들을 그림이라고 표현하는데, 마치 미술관 갤러리에 온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담장의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박혀 장식하고 있는 8개의 그림은 시리즈물이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대표하는 식물을 2개씩 그려, 아니 만들어 놓았다. 봄의 매화와 복숭아, 여름의 작약과 석류, 초가을의 국화와 늦가을의 국화, 소나무와 대나무를 수놓은 꽃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바로 매화이다.
구부정한 노인의 허리 같은 매화나무에 새로 자란 가지들이 위를 향해 쭉쭉 뻗어있다. 구부정한 몸체와 달리 위로 반듯이 솟은 가지들이 노인의 허리에 매달린 아이들 같다. 아직 꽃이 피기 전 이파리 없이 맺힌 봉오리들이 재잘댄다. 꽃피기 전 봉오리 맺힌 매화는 언제 필지 모를, 탁 트일 그 순간이 가져올 환희 이전의 기분 좋은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 분명한 꽃봉오리를 보는 것은 맑고 순수한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을 준다. 그림 위쪽의 가지에 무심히 걸린 달과 그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작은 새를 놓치면 안 된다. 보름달과 매화 그리고 작은 새가 겹쳐 만들어내는 장면은, 언제 지나갈지 모르는 이 찰나의 순간을 조용히 숨죽여 보게 한다.
경복궁은 정궁답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지를 표현한다. 사대문으로 둘러싸인 한양도성의 중심에 경복궁이 있고 또다시 네 개의 대문으로 둘러싸인 궁의 중심에 왕의 침소인 강녕전을 두고 주변에 4개의 건축물을 배치한 것은 태극기를 떠올리게 한다. 건곤감리와 태극의 안으로 들어가 그 정점에 왕의 침소를 배치한 구조는 음양오행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말해준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한다. 특히 조선의 기틀인 유학은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 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음양오행을 공간 배치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한 곳이 근정전이다.
근정전의 동남쪽 행랑에 서면 근정문 처마 끝에서 시작하는 인왕산을 볼 수 있다. 인왕산의 완만한 산세는 천천히 오르다 다시 떨어져 근정전의 왼쪽 처마와 만난다. 근정전의 웅장한 처마의 오른쪽 끝은 북악산의 가파른 산세와 만나 힘차게 올랐다 내려온다. 이렇게 멀리 있는 자연과 가까이 있는 인공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볼 때면 전율이 느껴진다. 목화토금수로 구성된 오행은 흙을 가운데 두고 사방에 나무, 금, 불 그리고 물을 배치하여 서로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화를 이루는지를 설명한다.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거나 죽게 하는 상생과 상극의 방식으로 온 우주는 움직이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한 학문이 음양오행이다. 전혀 다른 요소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음양오행을 공간으로 풀어낸 조선의 정궁다운 품위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스팟이다.
광화문에서 들어와 매표소로 가기 전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흥례문과 하나의 세트처럼 보이는 북악산을 감상해 보자. 어딘가 적절한 장소를 찾으면 북악산의 산세와 흥례문의 2층 처마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2층 처마의 왼쪽과 1층 처마의 오른쪽이 북악산의 산세와 절묘히 맞아떨어지는 장면은 의도한 것인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감탄이 터져 나오게 한다. 북악산의 산세가 일본의 산처럼 우뚝 솟았다가 바로 내려온다면 문의 왼쪽에 봉우리를 배치시키진 않을 것이다. 북악산의 아래에 배치하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고려한 공강배치는 경복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듯이 경복궁을 훑어보았다. 이제 다시 직접 거꾸로 경복궁을 오르면 된다. 경복궁에 가보고 싶어진 그 마음에 설렘이 가득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