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원짜리 향보다 3천원짜리 거품이 더 위로될 때
나도 e솝 핸드크림이 가지고 싶었다. 몇 년 전 아는 차장님의 데스크 위에서 처음 만난 e솝 핸드크림은 여느 평범한 핸드크림과는 달랐다. 플라스틱 튜브가 아닌 알루미늄 소재의 은은한 복숭아빛 패키지는 화가가 쓰는 물감 같이 우아하고도 키치한 분위기가 있었다. 온통 외국어로 써있는 친절하지 않은 성분표와 달콤한듯 쌉싸래한 비누향이 이국적인 이 핸드크림의 진가는 바로 가격이었다. 거의 4만원에 달하는 높은 가격이 '있어빌리티'를 진하게 풍기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 멋진 e솦 핸드크림이 가지고 싶었지만 핸드크림치고는 비싼 가격인데다 나의 벌이는 변변치 못했다. 무엇보다 나에겐 이미 만원도 안하지만 훌륭한 보습력을 자랑하는 뉴트로지나와 카밀의 제품이 두개나 있지 않은가? 합리적 소비자인 내가 이런 불합리한 결정을 감행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중고거래 플랫폼의 혁신, 하이퍼 로컬 서비스의 선두주자, 네카라쿠배당토에서 당을 담당하고 있는 당*마켓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매물들이 선물을 주고 받은 사람들 사이에 붕 떠서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해당 제품을 2만원 언저리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저렴하게 팔던 착한 사람은 지금쯤 복을 잘 받았을지….
과연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2솝 핸드크림은 꽤 근사했다. 부드럽게 발리는 가벼운 제형과 니치 향수 특유의 우디하고 시트러시한 라벤더 절간 어쩌구 향기가 칙칙한 사무실 공기를 화사하게 바꿔주는 듯 했다. 과연 나를 위한 작은 사치, 스몰 럭셔리 바람에 어울리는 제품이었다.
몇년 전만 해도 e솝은 세련된 패키지와 향으로 꽤나 독보적인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이런 제품들은 이제 니치 향수 브랜드들을 통해 더 쉽게 찾아볼 수 있게됐다. 조말론, 딥티크, 르라보 등 유명 해외브랜드들 뿐 아니라 보다 저렴하게 비슷한 향을 내는 템버린즈나 논픽션 같은 브랜드들이 많이 생겨났다. 기존의 흔한 레몬이나 복숭아가 아닌 향수같은 느낌의 제품들은 부담없이 주고 받는 선물용으로도 제격이었다. 특히 2솦의 레저렉션 핸드워시는 누구나 호불호 없이 쓸 수 있는 스테디셀러 제품으로, 집들이나 생일 선물로 자주 찾게 되는 나의 원픽 아이템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핸드크림이나 핸드워시의 향이 강하다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진한 향기는 몇십분이 지나도록, 음식을 먹을때에도, 커피를 마실 때에도 손에 남아 끈질기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예상하지 못했던 잔향은 자꾸만 칼국수를 먹으려던, 스시를 먹으려던, 와인을 마시려던 내 식욕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런 핸드워시를 쓰는 음식점의 고객들은 식음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맛있는 트러플 파케리를 만들어놓고 먹기 직전에 찐한 향수 냄새를 맡게 하는 것에 찬성하는 셰프는 없지 않을까? 100점짜리 미식경험을 90점 정도로 타협하는 경험을 한 후 부터는 진지하게 향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업장에서 음식과 관련 없는 향을 제공하는 일도 고객과 음식에 대한 고민의 부족을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미식가들이 스시집에 갈때 향수 뿌리는 것을 터부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여기 저기서 선물 받은/내돈내산 제품들을 써가는 재미 자체는 쏠쏠했다. 어떤 비누는 손에서 너무 오래 미끌거렸고, 핸드크림의 보습력은 형편 없었지만, 향수업체들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었고 욕실과 회사 데스크 위의 감성도 향기롭게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그러고 보면 향수 브랜드들은 핸드크림이나 바디워시 정도의 제품을 만들 뿐, 얼굴을 위한 스킨케어 화장품은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가진 것은 조향 기술이지 세정력이나 보습 등 스킨케어 분야는 원천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습력이 우수한 원조 핸드크림보다 이런 제품이 더 비싸게 팔리는 이유는 제 기능보다 '그럴싸함'이 중요해진 '향기 과다 사회'라서가 아닐까. 나 역시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후자를 선택했고, 결국 그 과한 향기에 의해 방해 받는 것으로 핸드크림 여정을 마무리했지 않은가.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정말 귀한 제품을 만났다. 바로 ‘아이깨끗해’ 핸드워시. 회사 캔틴에도 비치돼 있는 국민 손비누다. 이걸 집에서 쓰게 된 것은 선물을 받으면서였는데, 주민센터에서 임산부 등록을 하고 정부 지원 안내문 같은 걸 받아오는 길에 친절한 직원이 선물로 챙겨준 것이다.
펌프를 누르자마자 손에 가득 담기는 포근한 거품, 물에 닿는 즉시 흘러내려가는 산뜻함에 바로 오랫동안 원하던 '한 끗'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비로소 내가 원하던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손에 남은 향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가벼운 파우더 항이 은은하게 스치다 이내 사라진다. 더이상 보수적인 집안에 자기 주장 강한 중3 딸내미의 존재감 같은 기갈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육덮밥 맛집에 들어온 향수를 잔뜩 뿌린 디자이너 이브생로랑 같이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던 이질감에서 나를 해방시킨다.
'아이깨끗해'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쿠팡에서 2개에 6600원. 일본어 제품명 키레이키레이(깨끗해깨끗해!). 어른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멋쟁이 향들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제 역할을 다 하고 알아서 사라지는 비누향기가 순수하고 솔직하다. 과한 향으로 존재감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인스타그래머블'한 패키지가 유행하고 '있어보이는' 감성 마케팅이 살아남는 시대에 기능에 충실한 단순함이 빛난다.
분명 ‘아이깨끗해’는 미니멀 인테리어를 위한 제품은 아니다. 발랄한 파스텔톤 펌프통에 그려진 귀여운 일러스트는 건강해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심각한 감성 부족이다. 하지만 내가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은 — 이것이야말로 핸드워시계의 에르메스라는 것이다. 본질에 충실하고, 제품력이 우수하며, 믿음직하다. 남들이 뭐라 해도 세월이 증명한 건 바로 이 기본의 미학이다.
이후로 나는 손을 씻을 때마다 약간의 평화를 얻는다. 회사에서 머리가 복잡할 때면 나는 별 이유 없이 캔틴에 가서 ‘아이깨끗해’를 펌프질한다. 포근한 거품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타고 내려가면, 순간 뇌의 잡음이 꺼지는 듯하다. 누군가는 명상을 하고 누군가는 요가를 하지만, 나에게는 손 씻기가 일종의 리셋 버튼인 셈이다. 이 간단한 비누 거품 속에 인생의 밸런스가 숨어 있을 줄이야. 손을 닦고 나면 E솝 핸드크림을 부드럽게 발라준다. 근사한 향기는 여전하지만. 단, 밥 먹고 난 후에만 쓰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