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옥천군 이원양조장
여행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에서 저자는 여행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45세 딸과 80세 아빠의 여행기를 쓴 ‘왜 아빠와 여행을 떠났냐고 묻는다면’ 안드라 왓킨스는 힘들긴 해도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행운을 누리고,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더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소중한 사람을 붙들고, “그걸 못 한 게 한이 돼요”가 아니라 “같이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서라고 여행의 이유를 설명했다.
두 작가를 통해 여행의 이유를 유추해 본다면,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키고 나만의 발자취, 나아가 나를 넘어 타인이란 경계 사이를 허무는 무엇이었다.
아빠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슬쩍 여쭤보니 고 2 수학여행이 기억에 많이 남으신단다. 친구들과 여수 해저터널에서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던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하신다고. 엄마와의 신혼여행은 부산. 달콤할 것만 같았던 여행은 결혼식 후 몸살로 누워만 있던 여행으로 기억하신단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와의 첫 여행은 어릴 적 소풍이다. 아빠의 손을 잡고 바라본 무수한 풍경들이 이제는 스쳐가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 그 따스했던 감정만큼은 가슴 뭉클하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어른이 돼서 아빠와 단둘이 여행하는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물론 여행의 민낯이라 할 수 있는 다툼의 추억도) 만들어 갔다. 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호랑이배꼽 양조장에서는 술 빚는 아버지인 이계승 화가와 풍류를 즐겼다. 경기도 파주시 산머루 농원에서는 머루로 빚은 와인으로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하나 더, 여행하며 떠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발자취들도 알아갔다. 산성을 축성하던 일꾼들이 마시던 막걸리를 찾아 부산광역시 금정산성으로, 마지막 주막이 있는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주막으로, 1,500여 년의 시간을 간직한 한산소곡주를 찾아 충청남도 서천군으로, 일제강점기 ‘황국 신민의 맹세’ 비석이 남아 있는 전라남도 해남 해창주조장으로 아빠와 여행을 했다. 그중 가장 특별하게 기억하는 여행은 아빠의 옛 소풍길을 따라 떠난 여행,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양조장이다.
아빠의 옛 소풍길을 따라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향하는 길, 솔직히 말해 옥천을 처음 알았다. ‘향수’를 쓴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라는 사실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겨우 알게 된 정보였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모습의 아빠 옆에서 나는 정지용의 ‘향수’를 되뇌고 있었다. 아빠와 여행을 시작하면서, 양조장만큼 전국에 흩어져 있던 아빠 친구분들을 만났다. 여행 가는 김에 오랜만에 친구 얼굴도 보고 오자는 아빠의 바람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멀리 친구를 보러 올까? 하고 아빠를 따랐다.
처음 보는 친구분들은 어릴 적 아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공부 안 하고 몰래 담배 피우러 다니던 이야기, 몰래 밤에 창고에서 카세트 틀고 함께 트위스트를 추던 이야기, 친구들과 주먹다짐하며 싸우던 이야기, 처음 엄마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던 이야기 등등 내가 모르던 아빠의 옛 추억을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생각해보면, 아빠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연애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만난 아빠의 처음이 20대 후반 이제 막 아빠가 된 나이였으니, 그 전의 아빠의 삶은 알지도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도 나의 청춘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혹여 먼저 말해주려 하면, 듣지 않으려 하진 않을까? 이제야 아빠의 청춘에 귀를 기울이게 된 나는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중학생이던 시절, 옥천군은 이제 막 경부고속도로를 뚫던 공사장으로 난리도 났다고 한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빠는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과 옥천까지 걸어서 봄소풍을 왔다고.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며 옆에서 고속도로를 뚫던 소음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고속도로가 뚫리던 때니 이제 막 생겼던 샛길을 알게 돼서 친구들과 종종 놀러 오곤 했던 옥천군은 소풍의 추억을 담은 옛 추억의 동네다.
옥천군에는 100여 년간 동네에서 사랑받은 이원양조장이 있다. 이원양조장은 다른 양조자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오직 ‘옥천에서만’ 유통하는 탓이다. 그러나 숨겨진 보석은 어떻게든 빛이 나는 법.
이원양조장은 2017년 6월, 이원양조장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한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됐다. 현재는 강현준 대표가 4대째 이어 운영 중이다. 양조장에 들어서자, 막걸리통이 걸린 안내판이 정겹게 반긴다.
이원양조장에서 맛볼 수 있는 술은 총 세 가지다. 금강의 맑은 물과 100년간 대대손손 이어 온 비법으로 만든 6도 ‘아이원생막걸리’, 정지용 시인을 떠올리게 하는 10도 막걸리 ‘시인의 마을’, 우리 밀로 만든 9도 막걸리 ‘향수’. 이원양조장의 모든 막걸리는 100% 국내산 밀과 쌀을 사용하여 특별함을 더했다.
이곳의 자랑거리는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마당에 있는 우물이다. 우물터를 유지하는 양조장을 더러 보긴 하지만, 지금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하는 양조장은 흔치 않아서 의미가 남달랐다. 신기한 마음에 아빠와 나는 우물 안으로 고개를 쏙 넣어 보았다. 술 항아리를 닮은 우물 입구는 이원양조장만의 또 다른 볼거리다.
이원양조장에서 옥천의 명물 도리뱅뱅과 함께 술 빚기 및 견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덤으로 나오는 맛스러운 전과 막걸리도 맛보면 좋다. 이원양조장의 제품은 홈페이지 내 온라인 몰에서도 구입 가능하다.
이제 내게 물을 차례다. 어느덧 아빠보다 훌쩍 커버린 딸과 어릴 적 소풍 길을 따라 간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되니 여행은 한층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단순한 추억 회상이 아니라 세상의 안목을, 아빠의 진심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모르던 우리 술과 아빠를 알아갔다. 아빠와 웃고, 울고 다투며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서 성숙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여행은 안목과 성숙을 더 하는 배움이었다. 여행은 늘 새로움을 안겨준다. 우리 술을 새롭게 알아가고, 아빠의 청춘을 새롭게 알아가고, 또 아빠의 소풍 길을 새롭게 알아갔다.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움이, 어떤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가을날이다.
글 오윤희
전국 방방곡곡 우리 술 양조장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제 맥주 여행에도 함께하곤 했던 ‘볼 빨간’ 동행, 아빠를 벗 삼아 말이죠. 인스타그램 sool_and_journey
사진 김정흠
일상처럼 여행하고,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빠와 딸이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기에 염치없이 술잔 하나 얹었습니다. 사진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sunset.kim
주소: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묘목로 113
오픈: 월~금요일 09:00~18:00(주말 문의)
전화: 043 732 2177
홈페이지: www.iwonw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