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군 국순당
“아, 또 흰머리야. 벌써 몇 개째야. 나 이제 늙었나 봐”
아침에 일어나 부은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니 오른쪽 귀 뒤로 흰머리가 보인다. 요즘 들어 흰머리 뽑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게 개운치 않다. 내 나이 서른다섯, 임신 7개월 차 예비 맘. 흰머리 가득한 아빠에 비하면 아직은 늙었다고 그렇다고 젊다고 말하기도 모호한 나이지만, 흰머리 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새치 염색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나와는 달리 환갑을 지난 아빠는 이제 흰머리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젊게 보이려고 염색도 마다하지 않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아빠는 극구 염색을 하지 않으신다. 이유가 뭐냐고 여쭤보자, 이대로 늙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의 이치라고 한 말씀 하신다.
흰머리 하니, 추억이 하나 있다. 어릴 적 아빠와 했던 '거래'가 생각났다. 흰머리 하나 뽑을 때마다 100원. 아빠가 내 무릎에 누우면 이리저리 머리를 헤집으며 흰머리를 찾아 뽑았다. 그렇게 뽑은 흰머리 개수를 세서 용돈 벌이를 하곤 했는데,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니… 젊어지는 샘물이라도 마셔야 하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젊어지는 샘물, 마시면 힘이 세진다는 등 샘물 설화가 있는데, 그중 술과 관련된 주천酒泉 설화가 있다. 이 샘에서는 늘 술이 솟았는데, 신기하게도 양반이 가면 청주(淸酒)가, 상민이 가면 탁주(濁酒)가 나왔단다. 바로 설화 속 주천 샘이 흐르던 곳, 강원도 횡성군에는 국내 최대 규모 우리 술 공장인 국순당이 들어섰다. 국순당 안으로 들어서자, 한 노인과 청년의 백세주 이야기가 인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한 선비가 길을 지나다 청년이 노인을 때리는 모습을 보게 되고, 이를 지나가던 선비가 꾸짖자 노인을 때리던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단다. “이 아이는 내가 여든 살에 본 자식인데 그 술을 먹지 않아 나보다 먼저 늙었소.” 그 술이 무슨 술이냐고 선비가 묻자, 얘기하기를 “구기자와 여러 약초가 들어간 구기백세주요. ”라고 했단다.
이야기를 함께 읽고 나니 “그럼 아빠도 구기백세주를 마시면, 우리 딸보다 젊어지는 건가?” 농담을 던지신다. 국순당은 ‘우리의 누룩으로 좋은 술을 빚는 집’이라는 의미 한다. 이곳은 단순히 술을 빚는 집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박물관에 가깝다.
제품을 제조하는 공장 외에도 우리 술의 역사와 문화, 생산설비까지 체계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견학 프로그램 ‘주향로’를 운영하고 있다. ‘술향기 익어가는 길’을 의미하는 국순당 횡성공장 견학로 주향로는 방문객들을 위해 무료로 진행 중이다.
국순당은 잊혀 가는 가양주를 살리고자 하는 ‘복원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환경친화적인 공정으로 제품을 생산해 업계 최초로 녹색 기업으로 지정되었다. 국순당을 둘러보는 시간은 마치 여행과 비슷하다. 우리 술의 역사부터 국순당의 설립과 제조 공정까지 한눈에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제품 양조 공정 후 남은 폐수는 정화를 거친 후 공장 주위로 조성한 연못과 산책에 사용되어 운치를 더한다.
견학 후에는 국순당에서 제조하는 백세주, 명작, 예담, 막걸리, 아이싱 등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다. 시음장에 들어서자 건강이 우선인 아빠가 먼저 약주 ‘강장 백세주’를 시음하고 나섰다. 인삼과 오미자 등 귀한 재료를 넣어 만든 강장 백세주는 우리가 잘 아는 백세주보다 더 깊고 향긋한 향이 일품이다. 나는 평소 즐겨 마시던 캔 막걸리, ‘아이싱 자몽’을 마셔 보았다.
자몽의 상큼함과 탄산의 청량감이 가미된 아이싱은 알코올 도수도 4도밖에 되지 않아 가볍게 마시기 좋다. 캔맥주처럼 남녀노소 즐기기 좋은 우리 술이다. 견학이 끝나고 기념으로 백세주 한 세트를 받았지만, 아빠와 나는 술 전문매장인 ‘주담터’에 들렀다. 마시는 것은 물론, 바르면 좋은 우리 술 쇼핑을 했다.
뷰티에 관심 많은 나는 양손 가득 우리 술 말고도, 피부까지 생각해 이화주로 만든 마스크팩을 챙겨 왔다. 아빠와 함께 술 향기 가득한 길, 주향로를 나서는 길, 아빠가 한마디 던지신다. “백세주 마시고 백 세까지 살련다!” 너무 젊어지지는 마시고 백 세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딸 곁에서 있어 주세요.
글 오윤희
전국 방방곡곡 우리 술 양조장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제 맥주 여행에도 함께하곤 했던 ‘볼 빨간’ 동행, 아빠를 벗 삼아 말이죠. 인스타그램 sool_and_journey
사진 김정흠
일상처럼 여행하고,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빠와 딸이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기에 염치없이 술잔 하나 얹었습니다. 사진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sunset.kim
주소: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강변로 975
주향로 견학 프로그램│화~토요일 평일 3회, 주말 2회(일~월요일 및 공휴일 제외, 최소 10일 전 예약)
전화: 033 340 4300(내선 6)
홈페이지: drink.ksdb.co.kr
입장료: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