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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윤희 Sep 29. 2019

19. 대한민국 땅끝에서 우리 술 막잔

전라남도 해남군 해창주조장


19. 대한민국 땅끝에서 우리 술 막잔

전라남도 해남군 해창주조장



여행을 다니며 아빠가 이렇게 신나 보인 적은 처음이다. 왜 그리 흥에 겨웠는지 여쭤보니 땅끝마을 해남은 처음이란다. 어쩌다 보니 아빠와 해남까지 가게 되었다. 마지막 여행이니 못다 한 이야기를 좀 풀어야겠다. 2018년 4월 전통주 갤러리를 시작으로 2019년 3월까지 아빠와 우리 술 여행을 하면서 늘 여행이 좋았던 적은 아니다. 아찔했던 추억을 이번 기회에 고백해야겠다. 


아빠와 여행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바로 ‘코골이’다. 10시도 되기 전에 잠드시는 아빠와 자정은 돼야 잠드는 나의 수면 패턴도 힘들었지만, 해 뜨는 아침까지 코 고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이지 곤혹이었다. 더욱 나를 당황시킨 건 아빠는 절대 코를 곤 적이 없다며 당당하게 시치미를 뗄 때였다. 


하나 더, 숙소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은 호텔에서 트윈 베드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지만, 숙소가 마땅치 않은 곳에서는 이상한(?) 핑크 조명 가득한 모텔에서 아빠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었다. 아침식사로 해장국을 찾던 아빠와는 달리, 아메리카노와 빵을 즐기던 나는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을 하던 여행이었다. 


아빠와 여행을 다니며 난감하고도 세대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일은 바로 ‘통성명’이다. 처음으로 인사할 때 서로 성과 이름을 알려 준다는 통성명. 양조장에서 인사를 건넬 때마다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간단히 소개를 하고, 취재를 위한 질문과 대화들이 오고 갈 때 아빠는 틈새를 놓치지 않고 ‘본가가 어디요? 어디 성씨요? 몇 대 손이요?’  질문들을 던지곤 하셨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걸 따지겠나 싶은데, 아빠에겐 그 질문이 너무나 중요했었나 보다. 엄마 몰래 비자금으로 족보를 구입했다 들통나기도 했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싶었다. 그중 내 얼굴을 가장 화끈거리게 하는 것은 ‘정치’ 이야기가 하실 때다. 가족끼리도 조심해야 할 정치 이야기를 꺼내실 때면,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곤 했다.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건 이렇게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힘든 법이다. 


그렇게 맘고생했던 여행이 이제 마지막이라니…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가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전남 해남을 가장 마지막 여행으로 가게 된 이유는 바로 끝까지 아껴두고 싶었던 우리 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막걸리계의 슈퍼루키’라 불리는 해창막걸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27년부터 자리를 지킨 해창양조장은 오래된 정원을 닮아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40여 종의 각양각색 식물들과 700여 년 된 배롱나무가 오랜 시간을 말해 준다. 옛 일본식 정원의 형태를 갖춘 정원에는 오랜 시간의 향수와 가슴 아픈 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일제 강점기 청주를 빚던 양조장에서 시작한 해창주조장은 ‘황국 신민의 맹세’ 비석이 남아 있다. 아빠와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양조장을 둘러보지만, 이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해창주조장은 한때 폐업 위기를 맞았지만, 단골손님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막걸리 맛이 좋아 종종 사 먹던 양조장이 사라진다는 말에 직접 두 팔 걷고 귀촌하여 인수한 오병인, 박리아 부부가 현재 해창주조장의 대표다. 


2014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된 이곳에서 마실 수 있는 우리 술은 9도, 12도 찹쌀생막걸리다. 해창주조장 술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바로 해남에서 나는 쌀에 어떠한 감미료도 넣지 않고 본연의 맛을 살려 냈다는 점이다. 2018년 한 매체에서 선정한 ‘2018년 가장 사랑받은 막걸리’에 이름을 올릴 만큼 이미 이름난 스타인 막걸리 기도 하다. 



투박하지만 자꾸만 당기는 감칠맛이 바로 해창막걸리가 오랫동안 사랑받은 매력일 테다. 그리울 때마다 생각나는 보고픈 님 같달까? 아니다.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 싶은 사람, 아빠 같다고 해야겠다. 



드디어 우리 술 여행 대장정을 마무리한 아빠에게 해창막걸리로 건배를 건네 본다. “우리 술, 우리 사이 건배!” 올해 첫 매화를 만난 봄날, 대한민국 최남단 땅끝에서 마시는 술맛은 역시나 좋다.



글 오윤희

전국 방방곡곡 우리 술 양조장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제 맥주 여행에도 함께하곤 했던 ‘볼 빨간’ 동행, 아빠를 벗 삼아 말이죠. 인스타그램 sool_and_journey


사진 김정흠

일상처럼 여행하고,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빠와 딸이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기에 염치없이 술잔 하나 얹었습니다. 사진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sunset.kim



해창주조장


 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길 1
 운영 시간: 매일 09:00~18:00
 전화: 061 532 5152(견학 및 체험 사전 문의)
 홈페이지: haechangjujo.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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