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가슴이 답답해. 어디 탁 트인 곳으로 떠나고 싶어.”
고3 수원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답답하다’는 말을 내뱉곤 했다.
“그래. 입시 끝나면 어디든 떠나자.” 은주가 말하자마자, 수원이는 대답 대신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시험 성적, 대학 원서, 쏟아지는 과제… 은주는 아이의 그 답답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고3이 된다는 것은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 수백 번의 모의고사, 무수한 경쟁자들,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미래. 은주는 그 앞에서 한숨을 쉬며 책상에 앉아 있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저녁, 수원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시간 있어?”
“왜?”
“역사 수행평가 과제 좀 도와줘. 지역 조사하기인데… 자료는 찾았거든. 그중에서 인상 깊은 내용을 선택해서 리포트 작성해야 하는데, 뭐가 인상 깊은지 못 고르겠어. 그냥 엄마가 하나만 골라줘.”
은주는 “엄마가 뭘 아니?”라고 반문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usb를 받아 들고 노트북을 켰다.
“두근두근 신나는 노원 여행”이라는 파일이 열리자, <궁금해요! 노원구>라는 제목이 보였다.
『아주 오래전 넓은 평야지대에 갈대밭이 많아 갈대 蘆, 벌판 原을 써서 노원이라고 했다. 역사문헌을 살펴보면 고려시대부터 노원이라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또 노원은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교통로로,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가까워 역원이 만들어지면서 “노원역”이 되었다. 또 들판에 말들이 뛰어다니자 사람들은 이곳을 말+들, 곧 “마들”이라 불렀다.』
은주는 자료를 읽었다. 20년 넘게 살아온 동네였지만 정작 이름의 유래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넓은 평야, 갈대, 말…’ 은주는 조선 시대 때 노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넓은 평야 위로 끝없이 펼쳐져 흔들리는 갈대, 바람이 부는 들판을 달리는 말. 상상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말들이 뛰노는 갈대가 가득한 들판, 조선시대의 노원과 마들은 그런 곳이었으리라.
조선시대에 지어진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다니 우리는 정말 역사 속에서 살고 있구나.
“수원아, 이거 봐. 오래전에는 여기가 탁 트인 갈대밭 평야였대. 말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곳이었지. 엄마는 이 내용이 인상적이네.”
은주는 노트북 화면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수원이는 화면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 말들처럼 달리고 싶다. 어디 막힘없이, 내 마음대로…”
은주는 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들지? 지금은 답답하고 막힌 것 같아도 언젠간 너도 탁 트인 들판을 만나게 될 거야. 네 삶에도 반드시 가슴 벅차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창밖에서는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오래전 갈대밭평야를 스치던 그 바람일지도 모를 바람이, 이제는 아파트 단지를 지나 은주와 수원이의 방 창문을 흔들었다. 수원은 그 바람소리를 들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