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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May 05. 2022

I. 트루바두르, 사람을 위해 노래한 이들

디아 여백작 | 제1편

하늘에는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박쥐 같은 날개로 끊임없이 땅 위를 날아다니는 가고일이 목격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속에는 그 크기를 가늠하기도 버거운 거대한 레비아탄이 존재하는 시대.


인간이 오르기에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가파르고 거대한 돌산을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포악한 용의 전설과 야생 엉겅퀴와 가시나무가 만발하여 인간이 들어갈 엄두조차 못 내는 어두운 숲 속에서 기묘한 녹색 불빛에 기대어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내는 마녀가 존재하던 시대. 


미신과 전설이 난무하며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큰 힘을 발휘한 시대, 중세시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 포악하고 두려운 존재들로 우글거렸던 위험한 이 시대에서, 이 포악한 존재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사랑이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로 흉폭한 가고일이 사람을 잡아갈 때, 심해 속 레비아탄의 조그마한 기지개에 배가 뒤집어져 갑판 위의 한 사람이 바다에 빠질 때, 혹은 포악한 용이 아름답고 고귀한 공주를 납치하고 마녀가 아름답고 위대한 왕자를 홀려 깊은 숲으로 유혹할 때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오직 그 사람을 향한 사랑 하나만으로 위험한 존재들을 찾아가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유럽의 중세시대의 문학은 사랑을 주제로 빚어지며, 미술은 모든 고난을 극복한 연인의 승리를 담아내고 있으며, 음악은 위대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노래로 빚어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승되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주제는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 문학을 즐길 줄 알았던 중세시대의 귀족들이 열광한 이야기는, 고귀한 여인이 미지의 존재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함께 극복하여 구출하는 기사들의 고귀한 사랑 이야기였다. 중세시대의 평민들은 귀족들의 고결한 사랑이야기, 자칭 '궁정의 사랑 Amour courtois'을 '어떤 이'들의 입으로 전해 들으며 그들만의 이야기로 각색하여 그들만의 사랑 이야기를 즐기고는 했었다. 고귀하든 혹은 저속하든지 간에 이러한 모든 사랑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시로 창조되고, 이 시에 수려한 멜로디를 붙여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 노래로 빚어낸 '어떤 이'들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도 상상력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은 바로 '음유 시인'들이었다.





트루바두르 Troubadour.


음유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들은 서양 음악사를 논할 때 꼭 빠지지 않는 예술가들이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으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의 몸에서 발성되는 목소리는 그 어느 악기보다도 귀중한 악기였다. 중세시대의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사해주신 이 아름다운 악기로,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언어로 가장 귀중한 노래를 만들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경건한 예배와 함께 바치곤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 무한한 사랑을 찬송하는 시를 경건한 라틴어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빚어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노래로 교회의 홀을 가득 채우며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올려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는 단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해주는 조건 없는 사랑뿐이었을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피어나는 애틋한 감정 또한 사랑이라 부르지 않던가. 사람은 본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목소리라는 악기를 사용하여 애틋하고 절절한 자신의 마음을 아름다운 형태로 빚어 사랑하는 사람 앞에 바치고 싶지 않겠는가. 가장 열정적이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진실한 마음을 표현한 가사와 함께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 번은 겪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담은 노래에 내재된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한 트루바두르들은 자신들만의 미적 감각과 결합한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자신의 입으로 노래하였다. 물론 하나님께 바치는 경건하고 고결한 라틴어가 아닌,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이 녹아있는 각 지방의 언어로 말이다. 그래서 서양 고전 음악사에서 트루바두르의 기록이 등장하는 순간 항상 신을 향해 바쳐진 신성한 음악들이 처음으로 오직 인간만을 위한 인간적인 음악으로 분리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음악이 올림포스의 12 신들에게 바쳐지고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 Gregorius I의 지시로 흩어져있는 각 지방의 음악을 채보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바쳐졌을 때, 트루바두르는 각 지방에서 사용하는 지역어로 '시'라는 날실과 '음악'이라는 씨실을 서로 엮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음악을 사람들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럼 중세시대 세속 음악의 전반을 이끌어간 이들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직도 알 수 없다. 저명한 음악 역사학자들은 수많은 고서를 탐색하며 이들이 어디서 왔을지 그들의 기원에 집중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어떠한 학술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스페인 안달루시아와 인접한 아랍과 교류해서 생긴 새로운 음악, '아랍-안달루시아 음악 Arab-Andalusian music'에서 발생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또 어떤 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연구한 마리아론 Mariology 교리에 의거하여 발생되었다고 추측한다. 또 어떤 학자는 켈트족과 게르만족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추측하며 또 다른 의견을 가진 학자는 로마에서 탄생한 고대 라틴문학을 신봉하는 이들에 의해 파생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트루바두르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에 대해서는 말이다. '트루바두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은 12세기에 활동한 아키텐의 공작 윌리엄 10세의 궁정에 고용된 음유시인, 세르카몽 Cercamon이 작성한 한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Ist trobador, entre ver e mentir,
Afollon drutz e molhers et espos,
E van dizen qu'Amors vay en biays

트루바두르, 거짓과 진실 사이에 있는 자들
타락한 연인들, 여자들, 그리고 남편들
그리고 사랑은 엇갈린 채 흐른다고 주장하지

-세르카몽 Cercamon



초기 트루바두르 중 한 명인 세르카몽. 그의 본명과 생애 등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거짓과 진실 사이에 있는 믿을 수 없는 자들. 오크어로 작성된 이 고풍스럽고 고전적인 운문에서 세르카몽은 자신과 같은 음유시인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세르카몽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창작하여 진실처럼 노래하거나, 혹은 실제 존재하는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수사를 엮어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하는 음유 시인들의 모순들을 말이다. 세르카몽은 이 시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자신의 동료들의 이 모순적인 모습을 이 시를 통해 해학적으로 조롱하고있다. 어쨌든 음유시인 세르카몽이 이 시기에 이미 기록을 남기며 음유시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것을 고려하여, 트루바두르들은 아마도 11세기 후반 *옥시타니아 Occitània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지방인 옥시타니아에서 등장한 트루바두르는 그들이 경험하고 창작한 다양한 사랑의 이야기들을 자신들만의 언어인 오크어로 자신들의 악기에 싣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여행하며 퍼트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마을은 거대한 도시로 넘어가고, 도시는 나라를 넘어가게 되었다. 남부 프랑스의 트루바두르들은 이윽고 북부 프랑스에 도달하여 북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음유 시인 '트루베르 Trouvère'를 탄생시켰다. 이들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프랑스를 넘어 독일로 이어져 독일어를 사용하는 음유시인, '민네징어 Minnesinger'를 탄생시켰고, 스페인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음유시인 '칸티가 Cantiga',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의 음유시인 '라우다 Lauda'를 탄생시키며 처음으로 전 유럽이 사용한 라틴어의 경건한 음악에서 분열되어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담긴 지역어를 사용하여 자신들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음악이 신의 영역에서 벋어나 인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와 다르게 오직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재능을 바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중세시대에서도 신이 아닌, 오직 사람만을 위한 인본주의적인 예술이 존재하였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여러 기록서를 뒤져 찾아낸 트루바두르들은 약 450여 명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들은 전부 '트루바두르'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들이 지내온 인생과 그들이 살아온 환경은 전부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미지처럼 어깨에 류트나 리코더, 혹은 **포르타티프 오르간 Portative organ을 어깨에 메고 거센 비나 매서운 눈을 막아줄 모자와 망토를 착용한 채 다양한 도시를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여행한 트루바두르도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의외로 대부분의 트루바두르들은 부유한 귀족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한 곳에 오래 정착하였으며 안락한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자신들만의 음악을 발전시켜나갔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할 때도 노숙을 하며 고생스럽게 이동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도시의 영주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중이라 해도 이들이 방문을 알리면 전쟁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두 팔을 들고 환영하였으며 트루바두르들은 조그마한 민가보다 그 도시의 궁정에 초청되어 안락한 숙소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 도시에 머무르면서 높은 자부터 낮은 자에게 자신의 재능으로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선사해주었다. 한편 이들은 자신의 노래에 눈부시게 훌륭한 악기 반주를 곁들여줄 전문 연주가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종글뢰르 Jongleur라 불리는 이들은 류트와 하프, 기타, 비올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고용한 주인의 작품을 듣기 위해 몰려든 청중들에게 미리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콘서트의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트루바두르들은 대부분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으로 높은 자부터 낮은 자까지 중세시대 다양한 계층의 생활에 밀접하게 간섭하였다. 신분에 따른 차별이 만연한 중세시대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등한 광경을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남부의 깊은 그곳. 가파르고 찌르는듯한 높은 산이 켜켜이 둘러싸여 있고 그 앞으로는 거대한 성벽이 둘러싸인 고담한 도시, '디아 Diá'의 돌길을 따라 유유히 거닐고 있는 디아 여백작 Comtessa de Dia 또한 진실과 거짓 사이에 있는 자, ***트루바이리츠 Trobairitz 중 한 명이었다. 오늘도 이 백작은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자신의 유구한 도시를 샅샅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예술에 거름이 될 영감을 찾아 탐색하는 중이었다. 


<계속>



*옥시타니아 : 오크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지역 및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지역. 이탈리아의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가 프랑스의 지방어에 따라 오일어군과 오크어군으로 분리했는데 이후 그대로 지명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포르타티프 오르간: 1단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작은 오르간. '휴대가 가능한'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Portare'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이 오르간은 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한 손으로는 건반을 누를 때, 한 손으로는 풀무로 공기를 주입하여 연주하였다고 한다. 

***트루바이리츠 : 여성 트루바두르를 가리키는 여성형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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