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명령에도 오직 권력으로 음악을 손에 넣은 여자, 트루바이리츠
서양의 고전 음악사에서 여성들을 위하여 음악의 문을 열어주는 경우를 찾기란 옹색할 정도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신의 말이 절대적이었던 중세 시대에 여성들에게 허용된 그 좁은 문을 더욱 거세게 걸어 잠그며 여성들을 기웃거리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847년부터 로마의 주교로 활동한 교황 레오 4세 Pope Leo IV는 무슬림으로부터 신성한 로마를 지키기 위해 바티칸 언덕을 따라 레오닌 성벽 Leonine Wall을 쌓아 올린 위대한 교황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업적을 쌓은 위대한 인물도 여자들을 향해선 불편한 인색함을 드러내었다. 그는 하늘의 신께 올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는 합창단에 꼭 빠질 수 없는 성부, 소프라노가 필요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경외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바칠 여자들을 향해 힘차게 공포하였다.
'합창단에는 여자가 필요하지 않다.'
당시 교황의 말은 그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합창단에 여자가 필요 없다는 저 공포는 결국 공적인 자리에서 여자는 자신의 음악을 절대로 연주해 드러내지 말고 오직 숨어서 혼자서 연주하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중세시대에만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런 편협한 생각은 불과 한 세기 전인 20세기에도 발견된다. 1903년부터 활동한 교황 비오 10세 Pope Pius X는 종교생활 쇄신에 힘쓰며 오직 신만을 바라보며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따뜻한 사랑을 만민들에게 평분한 훌륭한 교황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위대한 신의 뜻을 펼친 이 교황이 서거한 이후 성인의 반열에 올려 오늘까지 만민들이 경모 하였다. 하지만 이 교황은 신자들에게 적극적인 예배 참여를 권장하였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여성 신자들에게 일말의 자비를 베풀 아량이 없었던 것 같다.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르네상스의 회화적인 다성음악을 사랑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중세 시대의 위대한 교황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성을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907년, 비오 10세는 하늘로 가장 높이 부상하는 소프라노 파트에 여자 대신 소년들로 대체하며 ─이 교황은 얼마나 전통을 사랑하는지 남성 가수 중 가장 높은 고음역대를 소화시킬 수 있는 남자 가수, 카스트라토까지 합창단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오르간 이외에 피아노, 타악기 및 모든 악기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중세 시대의 악습을 20세기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왕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교황이 내릴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중세시대의 여성들을 어떻게 굳게 잠긴 음악의 문을 열어야 할까. 그래서 여자들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였다. 평생 수도원에서 갖혀 살아야 하지만 결혼이라는 굴레보다는 자유로운 수녀의 삶을. 하늘의 신에게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고귀한 여자들에게는 굳게 잠긴 자물쇠가 스르륵 열렸다. 그렇게 여자들은 활짝 열린 음악의 문을 넘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재능을 펼치는 삶을 어느 정도 만끽하였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한없이 문을 걸어 잠근 중세 시대에 드물게 살아남은 여성 작곡가들은 유독 수녀원장이 많다. 9세기에 자신의 음악 작품들을 지키기 위해 수녀원장의 삶을 선택한 카시아 Kassia가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그가 작곡한 노래가 예배 시간에 불러지는 것이고, 11세기에 수녀원장의 삶을 선택하여 최초의 전례극을 오늘까지 음악 유산으로 전달한 힐데가르트 폰 빙엔 Hildegard von Bingen이 그 어느 중세 시대 작곡가보다 위대한 아티스트로 남을 수 있었던 연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신을 향해 자신의 모든 삶을 서원한 수녀가 펼칠 수 있는 음악은 신을 향한 경건하고 신성한 종교 음악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수도원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금욕적인 수녀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서도 음악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 걸까. 여자들은 자유롭게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 방법은 중세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을 사용하려면 선천적으로 고귀한 신분을 타고났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란,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야 했다. 신분이 존재했던 중세 시대,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고상한 귀족 여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트루바이리츠 Troubairitz는 중세 시대의 음악 역사 상 가장 이례적인 음악가이다. ‘여성 음유 시인’을 뜻하는 트루바이리츠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여성 귀족들이 자신의 신분을 영리하게 이용하여 태어난 음악가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음악의 문을 쉽게 넘어 다니며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특권을 당당하게 누릴 수 있었다. 트루바두르 Troubadour : 남성 음유시인와 다르게 성 안에서 대부분 활동해야 했지만 종종 이 여성 음악가들은 도시의 지배자와 민중들 앞에서 자신의 노래를 한없이 표현할 수도 있었다. 높은 신분의 고귀한 귀족분들이 음악을 하고 싶다는데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이 여성들은 굳이 음악을 하기 위해 수도원에 귀속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인즉슨 신성한 종교 음악에 자신들의 재능을 국한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미 신성한 종교 음악을 탐구하는 수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굳이 이 여성들이 종교음악을 선택할 이유가 있는가. 그래서 이들은 어떤 사람이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 ‘사랑’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노랫거리로 삼았다. 서양 음악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이 세속 음악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에 빠진 고귀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용맹한 기사 이야기를 다룬 장르, 즉 ‘궁정의 사랑 L'amour courtois’을 노래로 부르며 그 속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담아 노래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대에도 공감을 이끌어낼 정도로 유쾌하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랑’은 남성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아마 자매라고 추측되는 젊은 두 명의 트루바이리츠, 알라이스 Alais와 이젤다 Yselda가 노부인 카렌자 Carenza와 함께 쓴 한 텐소 Tenso: 두 명이상의 인물이 논쟁하는 형식의 시는 사랑의 결실인 ‘결혼’을 피하라는 간절한 애원이 담겨있다. 세속적인 결혼과 신과의 결혼을 피하라고 조언하는 이 텐소를 통해 결혼의 환상을 가진 남성 음유시인의 작품과 얼마나 대조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트루바이리츠 이자벨 Ysabel은 이 시대의 음유시인이라면 당연히 다룰 주제인 ‘궁정의 사랑’에 대한 반발심을 자신의 시에 담아냈다. 이 논쟁의 시의 등장인물은 시인 자신과 전 연인인 엘리아스, 그리고 엘리아스의 새로운 부인이 등장한다. 궁정의 사랑이라면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까. 전 연인이었던 이자벨은 엘리아스와 새로운 부인의 고귀한 사랑을 응원하며 무대에서 퇴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자벨은 달랐다. 이자벨은 자신이 사랑한 엘리아스의 새 부인의 앞에서 그를 모욕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엘리아스를 원망한다. 물론 이 갈등은 화해로 끝나며 다시 전형적인 ‘궁정의 사랑’식 결말로 맺어지지만 놀랍지 않은가. 감히 여자가 '사랑받고 싶다'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여 격렬하게 주장한다는 점이. 이러한 유쾌함은 남자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여자의 시선으로 사랑을 바라봤기에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트루바이리츠가 작곡한 작품에는 ‘사랑’ 이외에도 자신만의 철학과 유머를 담아내기도 하였다. 아잘라이스 달티에 Azalais d’Altier 라는 이름을 가진 트루바이리츠는 각종 학문에 조예가 깊은 음유시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무시당했다. 여자가 어떻게 심오한 고대 로마의 역사를 알겠는가. 아잘라이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남성들을 향해 자신이 얼마나 로마 역사에 대한 지식이 깊은지 드러내기 위해 로마의 역사를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시를 작곡하며 시 속에 등장하는 자신을 스스로를 칭찬하였다. 12세기 말에 활동한 마리아 드 벵타도른 Maria de Ventadorn라는 트루바이리츠는 트루바두르인 귀 뒤셀 Gui d'Ussel과 한 텐소를 통해 흥미로운 논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시에 등장하는 쟁점은 이러하였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애인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남자는 여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일까, 아님 그 여자의 하인으로 남을 것인가? 당연히 마리아 드 벵타도른은 후자를 취했다.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받는 순간 여자를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가. 마리아는 이렇게 시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자가 여자를 얻기 위해 헌신을 맹세하는 서약과 함께 무릎을 꿇는 순간 이미 하인으로 자원한 것이 아니냐며 말이다.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유머가 여성의 시선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음악에 재능을 가진 많은 귀족 여성은 여자들을 향해 옹졸하게 걸어 잠근 음악의 문을 쉽게 뛰어넘어 자신들의 지식과 유머를 뽐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알려진 트루바이리츠들은 고작 20명 남짓. 현대에 전해지는 460여 명의 트루바두르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에 불과하다. 당시 음유시인들은 자신이 창작한 시를 자신이 직접 멜로디를 붙여 하나의 노래로 부르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럼 음유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를 가사로 삼아 작곡한 음악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어떨까. 트루바두르가 창작한 완전한 음악 작품은 현대에 300여 개가 남아 우리에게 전해질 때 트루바이리츠의 완전한 음악 작품은 단 1곡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참담한 수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세 시대 말기 및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필사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음유 시인들의 작품은 중세 시대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활동한 필사가들에 의해 남겨진 음악 필사집, 샹소니에 Chansonniers에 수록되어 있다. 문제는 중세 시대에 전해지는 다채로운 음유 시인들의 노래를 수집할 때, 샹소니에를 편찬한 필사가들은 당연히 이 모든 노래들이 남자의 손을 거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노래를 작곡했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생각조차 안 한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시선과 여성의 시선으로 서로 교환한 논쟁 형식의 텐소 작품들은 여성의 이름을 지운 채 오직 남성의 작품으로만 귀속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의 음악 학자들은 트루바두르와 트루바이리츠의 작품을 구분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시가 양식화되어 문체로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미 음유시인들이 만들어 낸 정형시의 형식에 맞춰 쓴 글에서 어떻게 트루바두르와 트루바이리츠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초기 필사가들의 남성 중심적인 분류는, 트루바이리츠의 이야기들을 어둠 속으로 조용히 묻어버렸다.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특권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노래에 녹인 트루바이리츠. 현대에 고작 23곡 이상의 작품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남성 중심의 이야기로 가득한 중세 시대의 색다른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창을 만들어준다. 여자들에게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었던 이 지혜로운 여자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오늘까지 살아남은 이 여성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자칫 신을 향한 경건한 종교 음악 장르에만 남을뻔한 여성 음악가들의 업적에 세속 음악이라는 새로운 업적을 열어준 이 이례적이고 고귀한 여성 음악가들이 더 많이 세상에 발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