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Chu Mar 17. 2017

알제리음악 '라이'를 아시나요?

알제리에서의 열흘 15

여행자에게 음악은 하나의 척도이다. 한 나라의 음악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 나라의 정서에 친숙해졌다는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가장 추상적인 예술인 음악이 가장 강력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은 겪을 때마다 언제나 새삼스럽다.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음악을 통해 비로소 그 나라의 보편적인 감성, 솔직한 감정을 느낀다.   

  

알제리에서 알제리음악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다. 음식점에는 음악이 없고, 카페들은 예외 없이 축구채널을 틀어놓고 있으며, 위성케이블TV에서는 프랑스 채널이 눈길을 끈다. 그곳의 일상 속에서 음악을 접하기 힘든 이유는 이슬람이 음주가무를 권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음주가무가 인간, 특히 젊은이들의 영혼을 타락시킨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대중음악은 유럽과 미국의 팝 시장에서 인기장르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이다. 팝가수 ‘스팅’과 알제리가수 ‘쉐브 마미‘가 2001년 슈퍼볼 개막식에서 같이 부른 노래 ’데저트 로즈 Desert Rose', 그리고 클럽음악의 강자 ‘핏불’과 알제리 국민가수 ‘쉐브 칼레드’가 2012년 함께 한 ‘히야히야 Hiya Hiya' 등 미국가수들과의 콜라보가 꾸준하고, 알제리 가수와 유럽 유명가수들의 협연이 매년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슬람의 홀대에도 불구 알제리음악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사연과 알제리의 다양한 대중음악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여기에 언급되는 가수들의 음악을 유튜브로 들어보면, 시공의 간격을 뛰어넘어 그들의 뜨거운 영혼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멜훈(Melhun)’에서 ‘라이(Rai)’로    


알제리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랍의 향취가 짙은 대중음악을 장르화 시키는데 성공했다.  흥겨운 댄스리듬 위에 아랍식 멜로디와 창법을 얹은 알제리 음악은 서구의 팝음악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녹여내며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의 자존심과 배타성이 서구음악조차 알제리 화시킨 것인데, 국제도시 ‘오랑’에서 탄생한 이 혼종장르의 알제리 대중음악을  ‘라이(Rai)’라고 부른다.    

 

‘라이’ 이전 알제리를 대표하는 음악은 ‘멜훈(Melhun)’이었다. 사막의 베두인족, 투아그레족, 베르베르족은 각자의 민속음악을 지켜왔는데, 그중 음악적 형식을 가장 잘 갖춘 음악이 베두인족의 ‘멜훈’이다. 멜훈은 아랍기타와 피리 등 간단한 반주에 맞춰 남자가수(쉐이카, cheikh)가 아랍식 창법(멜리스마 창법)으로 고전시가를 읊조리는 음악으로, 우리나라의 판소리나 병창과 비슷한 형식이다. 소란스럽지 않고, 격식을 갖춘 전통음악 멜훈은 사막에서 손님을 맞는 최고의 접대였으며, 보수적인 이슬람에서 유일하게 공인받은 음악이었다.     


그런데 1890년대, 북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비이슬람 음악, 즉 재즈, 샹송, 플라맹고 같은 유럽의 음악이 알제리에 들어왔다. 종교와 민족 고유의 시가를 노래하는 멜훈과 달리 유럽의 음악은 리듬이 살아있고,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알제리의 지배층은 전통을 고수하고자 서구의 음악을 금기시했지만 서민들은 달랐다. 그들은 새로운 음악을 아랍식으로 변형하여 서민적인 감정과 정열을 음악에 담기 시작했고, 라이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가 공존하는 항구도시 ‘오랑’이었다.   

   

‘라이’의 원뜻은 ‘관점, 시각’으로 유목민들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가수는 ‘대가’나 ‘현자’, ‘명예로운 자’였다. (유목민들은 가수들을 ‘쉐이크Cheikh(남성)’, ‘쉐이카Cheikha(여성)’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쉐브’, ‘쉐이카’라는 말은 가수들의 이름 앞에 성처럼 붙어 있다. 직업을 이름에 명기하는 것에서 신분의식이 엿보인다.) 그들은 고민이 있을 때 현자들을 찾아가 인생상담을 했고, 현자들은 항상 ‘야, 라이...(Y Rai, 내 생각은...)’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대로 ‘라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음악에서도 의미를 더 중시하는 이슬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한편, 전통에서 벗어나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노래임을 명시하는 이중적 태도가 엿보인다.  


‘라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업적은 무엇보다 아랍고유의 창법과 멜로디를 유지하면서 서구의 팝음악을 용광로처럼 녹여냈다는데 있다. 반복적인 리듬, 음을 길게 늘어뜨리며 꺾는 창법은 흥겹고 개성이 강해 라이를 계속 듣다보면 다른 음악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라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들을 따라 한발 더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만나볼 주인공들은 ‘쉐이카 리미티’, ‘쉐브 칼레드’, ‘자말 알람’ 이다.     


라이의 여왕 ‘쉐이카 리미티’  

   


‘쉐이카 리미티(Rimitti 1923-2006)’는 ‘라이의 여왕’, ‘라이의 할머니’로 불린다. 그녀는 종교와 여성이라는 이중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라이를 대중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설적인 여가수이다. 리미티는 식민지시절 고아로 자라면서 먹고 살기위해 노래를 했다. 여성이 남녀 대중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그녀는 다른 재주가 없어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센트로의 캬바레나 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했다.     

그녀는 다른 여가수들과 달리 여성들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맘속에만 감춰왔던 가난과 본능과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한 노래들을 불렀다. 

“혼자 자니 옆구리가 움츠러들어요. 나를 뜨겁게 해줘요, 나를 감싸 줘요.” 

그녀는 이슬람 치하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는 은밀히, 그러나 빠르게 대중 속으로 퍼져갔다.   

  

타고난 성(姓)을 감춘 채 ‘사이다’라는 이름만 밝히고 활동하던 그녀의 인생은 쉐이카(남자가수) ‘모하메드 울드 에넴스’와 결혼을 하면서 크게 바뀐다. 음지에서 활동하던 그녀가 결혼을 계기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라미티’가 된 재미있는 일화는 그 변화의 현장을 전해준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어느 술집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고 박수를 쳤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술을 한 잔씩 돌리고 싶어 가게 주인에게 프랑스어로 ‘한잔 더, 한잔 더’를 외쳤다. 프랑스어가 짧았던 그녀는  ‘remettez-moi ça' 나 ’remettez-moi un verre’ 라는 말 대신 “remettez, madame, remettez”(한 잔 더, 한 잔 더)라고 외쳤고,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그녀에게 “가수 리미티 chanteuse Rimitti”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이름은 ‘리미티’가 되었고, 더욱 과감하게 영혼을 표현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잔이 나한테 오게 내버려 두세요. 잔을 돌리는 것은 좋은 일이예요.”

사회적 금기에 당당하고 자유롭게 맞섰던 그녀의 태도는 알제리 독립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그녀는 무장투쟁과 독립 알제리를 노래하는 한편 프랑스 경찰에 당당하게 맞서 싸움으로써 오늘날까지 대중과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는 최초의 여성 가수로 길이 남아 있다.      


그녀의 뒤를 잇는 여성가수로 ‘자후아니아 Zahouania’가 있고, 최근 가장 각광받는 여가수로는 ‘수아드 마씨 (Souad Massi)’가 있다. 1972년 생인 수아드 마씨는 1997년부터 하드락 밴드를 결성해 사회성과 저항의식이 강한 노래를 부르며 유명해졌다. 히잡을 거부하고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던 그녀는 당국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강력한 메시지, 시적인 가사, 포크와 플라맹고와 아랍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감미로운 선율의 그녀는 알제리의 ‘존 바에즈’라 불린다. 2001년 노테르담의 ‘월드뮤직엑스포’에서 “침묵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를 승리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알제리의 민주화를 염원했던 그녀. 정치의식만큼이나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수아드 마씨’는 월드뮤직 애호가라면 반드시 들어보아야 할 필청 앨범이다.


유럽을 강타한 국민가수 ‘쉐브 칼레드’    



라이는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 독립 이후에도 줄곧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이슬람 관습에 위배될뿐더러 식민의 잔재로 여겨졌기 때문. 많은 가수들은 예술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에 머물며 활동해야 했다. 1970년대, 프랑스의 라이는 더욱 대중적인 음악으로 변모했고, 알제리 이민자 사회를 기반으로 서서히 프랑스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민자의 음악 라이가 국내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1988년 있었던 ‘알제리 학생운동’ 때문이다. 석유파동으로 잘 나가던 산유국 알제리는 유가 급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고, 학생들은 당시 사회주의 정부를 상대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라이가수 ‘쉐브 칼레드 Cheb Khaled’의 노래를 합창했고, 이로써 이민자의 음악 라이는 국민음악이 되었다. 그때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도망쳐, 그런데 어디로? (El Harba Wayn? / to flee, but where?)‘였다.    


젊은이들은 어디로 갔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어디 있나?

부자들은 배가 불러 터지고

가난한 자들은 죽도록 일하는구나.

이슬람 광대들은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 결론은 뭐지? 우리는 알고 싶어.

너는 언제나 울거나 한탄하거나

도망칠 수 있어. 그런데 어디로?

(가사 및 내용 참고 : 정지용의 ‘라이-저항의 역사’)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말고  지금, 여기 조국의 현실을 바꾸자는 강한 메시지가 담긴 노래. 알제리 학생운동 이후,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치러진 선거에서 사회주의 여당은 강경 이슬람 정당에게 패배한다. 그러나 여당이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정권을 넘기지 않자 다수당이었던 이슬람 강경파가 들고 일어나 정국은 길고 비극적인 내전으로 치닫는다. 반면 라이는 알제리 국민들의 호응에 힘을 얻은 덕인지 프랑스에서 연이어 세계적인 히트 곡을 쏟아낸다. 1990년 이후 칼레드가 발표한 ‘디디(DiDi)'와 ’아이샤 (Aisha)‘가 유럽은 물론 인도 등의 제3세계를 강타한 것이 그것이다.

 

칼레드는 프랑스 팝 차트 1위, ‘프랑스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는 한편, 인도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압도하는 인기를 얻게 된다. 이로써 그는 국제적인 가수로 도약하였고, 라이는 국제적인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국제적인 인기에 힘입어 정부로부터 알제리음악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라이가 탄생한지 80년만의 일이었다.


쉐브 칼레드는 탄탄한 발성, 뛰어난 리듬감각, 폭넓은 음악세계로 현재까지 국민가수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후예들에는 ‘자후아니아’의 남편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암살당한 ‘라이의 왕자 쉐브 하스니 Cheb Hasni’, ‘라이의 어린왕자’로 불리는 미성의 알제리 이민 2세 ‘쉐브 포델(Faudel)’, 그리고 락음악 색채가 강한 ‘라쉬드 타하Rachid Taha’ 등이 있다.     


특히 칼레드와 포델, 타하가 파리에서 15,000 관중과 함께 민족영웅 ‘압델 카데르 Abdel Kader’를 부른 공연은 알제리 음악사에서도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또 최근에는 기존의 라이 곡들을 일렉사운드로 리믹스한 DJ들의 클럽앨범들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며 알제리 음악의 놀라운 장르 흡수력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중이다.    

  

음유시인들    



일반적으로 라이는 칼레드 류의 댄스음악을 지칭하지만, 알제리 국내에서는 포크계열의 서정적인 음악도 라이라고 부른다. 최신 장르가 아닌 관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랍선율이 가미된 알제리의 포크음악은 매혹적인 음색, 견고한 연주로 7,80년대 남미의 음유시인들에 버금가는 순도 높은 감성을 전한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가수는 알제리의 밥 딜런, ‘카빌리의 음유시인’인 ‘자멜 알람(Djamel Allam)’이다. '카빌리'는 북아프리카 백인 원주민 베르베르족이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고유문화와 고유 언어(카빌리 어)를 간직한 채 살고 있으며, 특히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의 이간책에 속아 프랑스에 협조했다가 국민적인 따돌림을 받은 바 있는 지역이다. 47년생인 ‘자멜 알람’은 20살 무렵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건너가 기계공으로 일을 하며 통기타를 들고 캬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도 카빌리 어로만 노래를 부르는 그는 1974년 데뷔앨범 ‘Laissez-Moi Raconter’ 가 전 유럽에서 반응을 얻으며 유명해졌고, 최근에도 프랑스에서 가수 겸 영화감독 겸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수아드 마씨’가 알제리 포크 음악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녀는 여성, 사회참여, 포크음악 등 여러 전통이 낳은 가장 중요하고, 문제적이며, 뛰어난 뮤지션이다.

 

이외에도 초기 라이의 낭만적인 흥취를 만끽할 수 있는 ‘쉐이크 벤피사 Cheikh Benfissa’,  트럼펫 연주자로 시작해 재즈와 라이의 절묘한 조화를 성취한 ‘메사우드 벨레모 Messaoud Bellemou‘, 포크가수로 시작해 국민작곡가 반열에 오른 ’이디르 Idir'와 같은 장인적인 음악가들도 있다. ‘라이’의 예술성과 완성도를 떠받치고 있는 그들의 탁월한 연주는 언제 들어도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마음을 설득한다.

 

음주가무가 금지된 음악의 불모지에서 화려하게 '라이'를 꽃피운 알제리의 가수들. 낯선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쉐이카 리미티, 자후아니아, 쉐브 칼레드, 쉐브 하스니, 쉐브 포델, 자말 알람, 쉐이크 벤피사, 메사우드 벨레모, 이디르, 수아드 마씨...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막의 장미(desert rose)가 아닐런지.


매거진의 이전글 이발소의 오후, 올리브 나무 아래의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