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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May 07. 2017

한국의 알제리 여인 '페리엘'

알제리에서의 열흘 18

유목민들은 손님을 신이 보낸 천사로 여긴다. 그들은 손님을 무람없이 환대하고, 손님은 다른 세상에 관한 이야기로 호의에 보답한다. 다른 세상, 다른 사람들에 관한 여러 소식을 전할 때 여행자는 진정한 천사가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알제리에서 온 여인 ‘페리엘’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손님이자 천사였다. 그녀는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우리를 맞았고, 먼 나라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알제리라는 거대한 성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드디어 문 안으로 성큼 들어선 기분이다. 문을 두드리면 문은 언젠가는 열린다. 


뜻밖의 만남    


페리엘을 처음 만난 것은 알제리에 다녀온 내가 아니라 아내였다. 얼마 전 아내는 작은 미술전시회에서 한국어를 아주 잘 하는 알제리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알제리에 가 있는 동안 불어와 아랍어라는 언어장벽 때문에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내내 아쉬웠고, 특히 남녀관계가 엄격한 이슬람율법 때문에 현지여성을 가까이 접할 기회도 없었기에 반갑고도 반가웠다. 끓어오르는 호기심으로 오래 된 소심함을 몰아내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만남을 청했다.     


알제리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은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해방촌이었다. 해방이후 서울로 돌아온 가난한 실향민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는 해방촌은, 빌라와 다가구에 주로 외국인들이 세 들어 사는 별난 산동네가 되어 있었다. 아내와 나는 가파른 언덕길 위, 카스바만큼이나 복잡한 골목을 헤맨 끝에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녀는 알제리 전통 다과상을 차려 놓고, 아름다운 알제리표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 나이로 28살, 짙은 이목구비에 귀여운 인상, 차분하면서도 사교적인 성격, 유창한 한국어, 풍만한 체형에 다소곳한 몸가짐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한국에 알제리를 오해 없이 알리고자하는 그녀의 뜻을 담아서 그날의 유쾌했던 만남을 인터뷰 형식으로 전한다.

    


알제리 여인 '페리엘'과의 인터뷰    


<개인 신상에 관하여>    


Q. 

‘페리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산딸기’예요. 정식이름은 ‘페리엘 밴타할’인데, 이름에 들어 있는 ‘밴’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밴타할’은 타할의 아들이라는 의미이죠.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프랑스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알제리는 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인들이 주민등록을 만들면서 성을 붙였죠. 그런데 프랑스 사람이 성을 물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욕을 했어요. 그것이 욕인지 몰랐던 프랑스인들이 그대로 그것을 받아 쓴 바람에 지금도 욕을 성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아내는 산딸기라는 의미가 페리엘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했다. 또 사람들이 욕을 계속 성으로 쓰는 이유가 아마도 프랑스인에게 저항을 한 가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Q. 

알제리는 대가족이 모여 산다고 들었는데, 페리엘 가족도 대가족이 모여 사나요?

A. 

아니요. 알제에 부모님과 여동생이 살고 있어요. 외가 쪽은 대가족이 모여 살아요. 알제에 사시다가 ‘시누아’로 이사를 했는데, 증조할머니까지 같이 살아요. 외할아버지는 타일모자이크 기술자인데, 젊어서는 이탈리아에 스카우트되어 7년간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월급을 거의 받지 못해서 할머니가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돈을 모았어요. 할아버지는 예전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별로 과거에 연연하지는 않는 분이에요. 두 분 다 지역사회에 적극적이시라 할아버지는 시의 지원을 받아 지역청년요트모임을 만들었고, 할머니는 동네일로 시위를 하다 두 번이나 경찰서에 갇히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항공기 엔지니어였는데, 지금은 퇴직을 하고 작은 건축회사를 하세요.      

('시누아'는 지난번 여행에서 철지난 해변산책, 이발소, 올리브 나무 아래의 청년들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 반가웠다. 페리엘은 외할아버지의 모습과 할아버지가 직접 짓고 장식했다는 외갓집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시누아에서 내가 묵었던 호텔 근처에 송아지고기 요리로 유명한 맛집(‘브라임’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다며 가보았냐고 물었다. 몰랐다고 하자 채식주의자인 그녀는 크게 아쉬워했다.)    


Q. 

알제리는 자존심이 강한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어떤 나라인가요?

A.

알제리는 알제리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독립과 자주성을 가장 중시해요. 그래서 다른 나라들의 전쟁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지만 독립을 하려는 나라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죠. 예를 들면 모로코와 서사하라 간에 다툼이 있었을 때 알제리는 서사하라의 독립을 도와주었고, 그래서 모로코와 사이가 안 좋아졌어요. 같은 이유로 에티오피아에서 에리트리아가 독립을 하려 했을 때 평화협상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가장 큰 사회문제는 30세 이하가 인구의 절반이라서 청년실업이 높다는 것인데, 사막에 석유 말고도 지하자원이 많기 때문에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존심과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죠. (군대에 대해 물어보자) 모든 남자는 2년 동안 의무복무를 해요.    


Q. 

알제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나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A.

티피자에서 세르셀로 가는 해안도로요. 작은 마을들도 좋고 해산물도 많아요. 동부의 해변으로는 베자이아가 좋아요. 그리고 전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차 3대에 나눠 타고 한 달 동안 사하라 사막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알제리는 휴가가 한 달이거든요. (노트북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이건 그때 사막이 시작하는 마을 ‘하르데이아(사막의 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예요.     


Q. 

알제리의 동부나 사하라 지역은 위험한 곳이 많다고 알려 있는데 실제로 그런가요?

A.

알제리 전체가 외국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위험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 제가 한국에 간다고 했을 때 프랑스 친구들이 거긴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나라 아니냐고 걱정을 했는데, 외국에서는 항상 남북한의 불안한 뉴스들만 보여 지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알제리도 몇 가지 테러뉴스만 크게 알려진 탓에 실제보다 더 위험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조심은 해야해요. 과거 이슬람 강경세력 일부가 아직 동부지역이나 사막지역에서 숨어서 활동을 하고 있고, 정부군이 계속 진압작전을 벌이고 있으니 그런 지역은 위험하죠. 그래서 알제리 사람들도 그런 곳으로 여행을 갈 때는 그 지역의 현지주민과 함께 가요. 군대에서 작전을 벌어지기 전에 현지주민에게는 어디어디서 작전이 있을 테니까 출입을 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거든요. 사하라 사막도 가이드는 모두 투아레그 원주민이 하고 있고요.     


Q. 

알제리에 가기 전에 북아프리카에는 개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들었는데, 알제리에는 개가 거의 없고 고양이만 많았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이슬람에서는 개를 불경한 동물로 여겨요. 기도할 때 개가 지나가면 반드시 그 자리를 청소를 해요. 하지만 고양이는 무함마드도 좋아한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돼지의 경우 학자들에 의하면 살 속에 사는 기생충이 인간에게 전염되었기 때문에 기르거나 먹지 않게 되었다는 학설이 있고요. 동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알제리에서는 사하라 사막의 양고기를 최고로 쳐요. 라마단이 끝날 때 제물로 쓸 양을 1년 전에 주문을 해요. 부잣집에서는 3마리를 잡아 1마리는 신께 바치고, 한 마리는 이웃에게 나눠주고, 한 마리는 가족들이 같이 먹죠.      


Q.

라마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라마단 기간은 정확히 언제인가요?

(라마단: 마호메트가 신께 처음으로 경전을 받은 날을 기념하여 이슬람력 9월 동안 성찰과 금욕을 하며 낮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밤이 되면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A.

라마단은 이슬람력에 따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날짜계산과 달라요. 예전에는 겨울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면 여름이 되기도 해요. 올해의 라마단은 5월 말이에요. 정확한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고, 그 달이 시작될 무렵 종교지도자들이 달이 가장 잘 보이는 사하라 사막 가장 깊숙한 곳에서 달을 관찰해 날짜를 정해서 '내일부터다, 모레부터다' 이런 식으로 알려주죠. 그러면 라마단이 시작되고, 끝날 때도 마찬가지로 종교지도자들이 직전에 알려줘요. 또 나라마다 시작하는 날과 끝나는 날이 달라요. 물론 메카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결정이 권위가 강하긴 하지만 알제리는 자존심이 강해 그들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지 않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해요. 라마단이 끝나면 부자들은 세금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최저금액을 정해요. (최저금액을 정하는 것은 기부의 실효와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다.)      


Q. 

알제리의 이슬람은 많이 엄격한 편인가요?

A.

알제리 국민의 99%가 무슬림이고, 나머지 1%는 가톨릭이에요. 거의 전 국민이 무슬림으로 신앙심이 강하지만, 아주 큰 몇 가지 원칙 외에 율법에 따르는 정도는 사람마다 조금 달라요. 라마단은 모두 지키지만, 하루 다섯 번 기도는 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무슬림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4가지 율법(알라를 유일신이라 믿는 것, 무함마드는 최후의 예언자라는 것, 평생에 한 번은 메카를 순례할 것, 그리고 라마단을 지킬 것)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외의 종교생활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어릴 때 성당 수녀님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는데 아주 즐거웠어요. 남녀간에 일상적으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는데, 공공장소에서 스킨쉽을 하지는 않죠.     


<한국생활에 관하여>    


Q. 

한국에 온지는 얼마나 되었고,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A. 

한국은 3년째예요. 알제리에서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살 때 프랑스로 가서 파리6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과학 쪽에 흥미가 없어져서, 다시 파리7대학에서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어요. 그때 파리에서 한국인 친구를 알게 되었고, 그 친구를 통해 한국에 관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한국어 과정을 끝내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번역과에 정식으로 입학해 다니고 있어요.     


Q.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을 하고 있나요?

A. 

주로 번역을 해서 마련하고 있어요. 아랍어의 경우 중동지역과 거래하는 회사의 계약서나 국제변호사들의 법률서류를 번역하기도 하고, 프랑스어 개인교습을 하기도 해요.     

(그녀는 프랑스어, 아랍어, 영어, 한국어에 능통한 능력자이다. 한국어의 경우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한자어 단어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Q. 

한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요?

A.

부모님은 '도대체 언제까지 공부만 할 거냐, 이제 일을 잡고 정착을 해야 하지 않겠니?'하며 답답해 하셨죠.ㅎㅎㅎ   


Q. 

한국에는 얼마나 많은 알제리인이 있나요? 그리고 주로 무엇을 하나요?

A. 

150명 정도 살고 있어요. 대사관 직원 외에는 거의 다 학생이예요. 저같이 개인적으로 온 경우는 드물고, 주로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을 받아 교환학생으로 온 경우가 많아요.     


Q. 

알제리 대사관은 주로 무슨 일을 하나요?

A. 

주로 비자업무가 많다고 해요. 한국에 와 있는 알제리 사람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다 잘 알고 지내고, 특별한 날에는 다 같이 모이기도 해요. 이번 달에 라마단이 시작되는데 그때도 모두 모일 거예요. 특히 얼마 전 북한이 핵실험을 한다고 했을 때 대사관에서 전쟁이 날 경우 행동요령을 알려주었어요. 모두 대사관으로 대피해서 같이 중국을 거쳐서 알제리로 가자고. 같이 사는 영국친구는 자기네 대사관에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다며 영국인들은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농담을 했어요.              


Q. 

한국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인가요?

A.

제가 가본 지방은 다 좋았어요. 저는 도시보다 지방을 좋아해요. 거제도나 삼척도 좋았고, 서울의 부암동 같은 동네도 좋아요.    


Q. 

한국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요?

A.

한국은 사람들의 사회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요. 지하철이나 길에서 몸이 부딪힐 때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요. 이젠 많이 적응이 되었지만 처음엔 많이 놀랐어요. 또 출입문에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지 않는 것도 불쾌했어요. 한국에 온지 30년 된 외국인 교수님 말씀으로는 한국의 문은 원래 옆으로 미는 문이 많아 그런 습관에 없는 것 같다고 했어요.    


Q. 

한국과 알제리의 공통점이 있다면요?

A.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는 너무 다르다고 하지만, 저는 정서적으로는 매우 비슷하다고 느껴요. 가족문화는 정말 비슷해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고부갈등이나 명절 증후군은 알제리도 똑같아요. 가끔 한국에서 택시기사님들하고 얘기를 나누다보면 ‘아, 거기도 그러냐’ 하는 경우가 많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은요?

A.

다행이 대사관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어 앞으로 졸업 때까지 3,4년 동안 한국에서 지낼 예정이예요. 프랑스 대학의 교수님과 진행 중인 연구 과제를 계속 진행하고, 한국 사람들의 이슬람에 대한 의식을 조사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어요. 졸업 후에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방안은 어둑해졌다. 누구도 실내등을 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각자의 일정이 쫓겨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한 번의 만남으로 많은 것을 알고, 느낄 수 있었던 보람 진 만남이었다. 몇 권의 책, 수많은 검색보다 더 유익했다. 한국에서의 만남이었기 때문일까? 당당하고 낙천적인, 활달하면서 소박한 알제리인의 매력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알제리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준 페리엘과 그녀를 만날 수 있게 해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이제는 제법 낯이 익은 해방촌의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왔다. 첫번째 알제리 여행을 해방촌에서 마감하게 될 줄이야.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던 출발과 어울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이다. 낯선 골목 끝에 천사가 나타나 문을 활짝 열어준 여행의 결말이 마음에 든다.         


"싸하~, 슈크란~ 페리엘!

알 함두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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