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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Oct 10. 2017

알제리가 카뮈와 엔리코 마샤스를 거부하는 이유

알제리에서의 열흘 19



알제리와 카뮈

     

'알베르 카뮈'는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해 알제리의 자연을 찬양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뮈를 통해 그곳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거의 모든 현지인에게 카뮈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계인들은 카뮈를 통해 알제리를 기억하지만 정작 알제리는 카뮈를 기억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카뮈와 알제리 사이의 석연치 않은 관계는 첫 번째 여행의 과제로 남았다. 진짜 알제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카뮈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알제리와 두 번째 알제리의 간주곡으로 그들의 애증을 정리하려 한다. 여기에 더해 카뮈와 함께  같은 알제리 태생의 피에누아르 ‘엔리코 마샤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 난제인지를 알 수 있다.   

     

카뮈는 알제리 태생으로 대학까지 알제리에서 성장했다. 알제의 ‘뷔조대학’(우리식으로 하자면 경성제국대학을 ‘이등박문 대학’이라 칭한 격)을 졸업한 그는 이십대 중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유럽에알려지기 시작했고, <콩바(전투)>라는 잡지의 편집인으로 활약하며 대표적인 앙가주망(참여)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나치 투쟁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 마다가스카르의 반란, 헝가리 독립투쟁, 동베를린 혁명에 대해 보여준 단호한 언론인의 모습은 알제리를 배경으로한  <이방인>, <시지프스 신화> 와 같은 그의 초기작들을 더 의미심장한 무엇으로 만들었고, 그 명성은 <페스트>(1947)의 출간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카뮈는 알제리의 자연과 태양을 사랑했고, 오랜 시간 동안 그 감격을 기록한 수필 <결혼>과 <여름>을 남겼다. 그에게 알제리의 자연은 단순한 감탄의 대상이나 추억의 장소 이상의 의미였다. 너무나 예민해서 곧잘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빠지던 그에게 알제리의 자연은 유일한 영혼의 안식처였다. 그곳에서만이 그는 긴장에서 벗어나 세상과 '결혼', 즉 화해 할 수 있었다.  

     

여기에오면 나는 질서나 절도 따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 버린다.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한 사랑이다...(중략)... 이 태양, 이 바다, 젊음이 용솟음치는 이 가슴, 소금 맛이 나는 나의 몸, 그리고 부드러움과 영광이 노란빛과 푸른빛 속에서 만나는 장대한 무대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것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의 힘과 능력을 모두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그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 <결혼> 티파자에서의 결혼에서  

     

거침없는 질주로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페스트> 이후로 서서히 삶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성공작들에 대한 부담과 지병인 폐결핵이야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을 터, 1954년 발발한 ‘알제리 전투’야말로 그에게 닥친 최대의 난제였다. 알제리의 독립요구 앞에서 카뮈는 정체성의 위협을 느꼈다. 그들의 요구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너무나 뒤늦은, 누가 봐도 정당한 것이었지만, 카뮈는 이 국면에서 한 나라의 독립 문제를 자신의 존재론적 문제와 등치시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다.


그는 알제리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기자로 복귀해 알제로 달려갔다. 하지만 날카롭고도 단호한 논리로 빛을 발했던 그의 지성은 ‘알제리 독립’ 앞에서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카뮈는 알제리의 국민감정을 무시한 채 피에누아르도 알제리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알제리 국민 중의 하나라고 여기며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카뮈는 ‘프랑스 본국의 군대는 알제리에서 철수해야하고, 피에누아르(알제리 태생 프랑스인)와 알제리 원주민의 협의 하에 자치를 실행해야 한다’는 양쪽 모두 바라지 않는 않는 타협안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알제리의 원주민이 그들만의 힘으로는 정상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없으므로 피에누아르와 협력해야만 하다는 것이었다.

     

카뮈의 알제리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컸다고 좋게 봐줄 수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이것은 일종의 어리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성인 카뮈가 이토록 유치한 현실인식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알제리의 자연이지, 알제리 민중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카뮈는 어릴 적 산동네 빈민가에 살 때에도 알제리 아이들을 아랍인들이라고 뭉뚱그려 불렀을 정도로 원주민들에게 무심했다. 그는 그곳을 또 다른 프랑스로 여겼을 뿐 단 한번도 독립국가로 인식한 적이 없었고, 피에누아르와 원주민의 관계를 지배,피지배의 국가적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빈부나 민족과 같은 국내문제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인 없이는 알제리가 정상국가를 건설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알제리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발언를 무신경하게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알제리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57년,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알제리 때문이었을까? 상을 받는 그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고,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알제리가 채 독립하기 전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알제리와 카뮈의 관계는 어색한 채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오늘날 알제리는 단호하게 카뮈를 기억에서 지웠고, 카뮈가 쓴 <결혼>과 <여행>만이 헤어진 연인의 연애편지가 되어 전 세계를 떠돌게 된 것이다. 


사실 카뮈에게 야박하기로는 알제리보다 프랑스가 더하다고 할 수 있다. 카뮈는 프랑스의 지식인들로부터 그들이 침묵하는 동안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에 회의를 품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제리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그의 기념관과 동상은 여전히 파리 바깥구에 썰렁하게 방치되고 있는데, 제3자의 관점에서 알제리의 뒤끝보다 더 야속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카뮈에 대한 프랑스의 홀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제리와 엔리코 마샤스

     

카뮈의 애증이 종결형이라면, 프랑스 샹송 가수 ‘엔리코 마샤스 Enrico Macias’ (앙리꼬마사스)’의 애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1938년 알제리의 ‘콘스탄틴’에서 스페인계 어머니와 프랑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1961) 알제리독립전쟁으로 알제리를 떠나야 했던 그는 마르세이유로 향하는 배 위에서 멀어지는 알제리를 바라보며 만든 노래 〈안녕, 나의 조국 (Adieu, mon pays)〉로 프랑스에서 데뷔했다. 십대 중반부터 알제리에서 기타를 연주한 그이기에 데뷔곡인 ‘아듀 몽 페이’는 물론 초기 음악들 대부분에 아랍의 창법과 기타 선율이 짙게 묻어있다.   

그는 87년 또 다른 고향을 그리는 노래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 (La France de mon enfance)>를 한다.  

     

La France de mon enfance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N'tait pas en territoire de France (프랑스 땅이 아니었어요)

Perdue au soleil du ct d'Alger (알제리 연안의 태양을 잃어버린)

C'est elle la France o je suis N. (그 나라가 바로 제가 태어난 프랑스에요)

     

아랍음악에서 완전히 탈피한 그의 샹송은 감미롭기 그지없지만, 가사에 담긴 뉘앙스는 듣기에 따라 의미심장하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일부였던 시절을 은연중에 그리워하고 있는 듯한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니까. 하지만 ‘알제리 전투’ 때만큼 절박한 적대상황은 아니므로, 피에누아르에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을 노래할 권리는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터키와 이집트의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그들을 위해 별도의 앨범을 발매하는 성의를 보이는 등 데뷔 이후 줄곧 아랍권 국가들과 친밀하게 지내온 가수이기도 하거니와 UN 사절로서 세계평화와 어린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을 벌여오고 있으니, 그의 노래를 굳이 악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빈 라덴의 유품인 1500개의 카세트테이프 속에 담긴 유일한 노래가 엔리코 마샤스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음악으로 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의 색다른 증거이기도.  

     

그런데 엔리코 마샤스는 카뮈와는 다른 의미에서 알제리로부터 배척당한다. 그는 피에누아르인 동시에 유태인이었던 것이다. 아랍국가는 물론 조상들의 나라 이스라엘에게도 우호적인 그를 바라보는 알제리의 심경은 복잡했다. 엔리코 마샤스가 문을 두드릴 때마다 알제리에서는 격렬한 내부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엔리코 마샤스는 알제리 내전이 끝난 직후부터 알제리를 방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알제리의 라이 가수들인 ‘쉐브 칼레드’나 ‘쉐브 마미’와의 협연하면서 음악적으로 소통하는 한편, 기회가 될 때마다 알제리 당국에 입국을 신청했다. 그의 첫 입국신청은 알제리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2000년도였는데, 당시 시위대의 지도부는 피에누아르인 그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들은 정국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엔리코 마샤스라는 변수를 원치 않았다.

     

2007년 그는 또 다시 입국을 시도한다. 프랑스 수상 사르코지 내각의 일원으로 알제리를 방문하려 한 것이다. 알제리는 UN 평화의 가수이자 알제리 태생 유태계 가수의 방문에 대해 뜨거운 내부논란을 벌였고, 결국 그를 명단에서 빼지 않으면 회담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해 버리고 만다. 입국거부에 대한 알제리 당국의 공식적인 사유는 엔리코 마샤스가 이스라엘의 샤론 수상의 재선을 지원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엔리코 마샤스가 샤론 수상을 지지한 이유는 샤론 수상이 비록 전쟁영웅 출신이긴 하지만 재선을 노릴 당시 노동당과 연합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속사정은 샤론 수상에 대한 알제리의 악감정에 가려지고 말았다. 당시 사르코지는 프랑스 수상으로는 최초로 과거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기로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기에, 엔리코 마샤스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 하겠다.

     

엔리코 마샤스의 방문은 2012년 알제리 통상장관 ‘나세르 메할’이 긍정적인 발언을 하며 또 한 번 이슈가 된다. ‘알제리 방문을 원하는 프랑스인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다.’는 그의 선언으로 엔리코 마샤스의 알제리 방문은 금방이라도 성사될 듯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를 거부한 것은 반대론자들의 여론전이었다. 입국허기 반대론자들은 그의 가족의 전력을 문제삼았다. 그들은 유튜브 영상을 통해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친척이 알제리 전투에서 알제리인을 죽였고, 그의 할아버지가 모스크에 오줌을 쌌다는 사실이라며 “우리는 엔리코 마샤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후자는 악의적인 루머일 확률이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혹시 모를 사고를 염려한 정부는 엔리코 마샤스의 방문허가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엔리코 마샤스의 알제리 입국은 전 국민적 합의를 요하는 사안이 되어버렸고, 이것은 영원한 입국불가나 다름없는 결론이었다.    

     

엔리코 마샤스도 결국 현실을 받아들였다. 2014년 기사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내의 반유대주의에 항의하는 뜻으로 이스라엘 시민권을 신청했다고 한다. 고향과 동족 사이에서 오랫동안 힘겨운 줄타기를 해 온 그는 또 다른 국면 속으로 몸을 던졌고, 이것으로 그의 극적인 알제리 방문은 물 건너간 듯하다. 엔리코 마샤스의 경우 알제리의 대응이 각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화해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인도의 제국경찰로 근무한 바 있는 조지오웰의 이 말을 떠올리며 화해를 위한 프랑스의 국가적 차원의 분발을 바라본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 본 사람으로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 조지오웰의 <위건 부두 가는 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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