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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Oct 28. 2017

알제리내전과 ‘벤탈라의 성모’

알제리에서의 열흘 20


벤탈라의 성모 Madonna of Bentalha


1997년, 알제리내전 당시 알제 인근 마을 ‘벤탈라(Bentalha)’에서 반군의 학살로 가족을 잃은 한 어머니가 ‘지미를리 Zimirli 병원’의 벽에 기댄 채 비통해하고 있다. 이 사진은 프랑스 AFP통신 소속 사진기자 ‘호신 자우라르 Hocine Zaourar’가 촬영한 것으로, 죽은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피에타)을 연상시킨다하여 ‘벤탈라의 성모 Madonna of Bentalha’라고 불린다. 모성을 통해 내전의 참혹함을 고발한 이 사진은 ‘1997년 월드프레스포토’로 선정되기도.

‘벤탈라의 성모’는 왜 망연자실해 하고 있을까? 도대체 벤탈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암흑의 10년 Black Decade


알제리의 근현대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알제리전투’(1954-1962)와 ‘알제리내전’(1992-2002)이다. 이 두 사건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6.25전쟁’과 유사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독립전쟁의 경우 그들과 우리 모두 독립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내전’의 경우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 내막을 알 수 없다.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원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의 현 집권당인 FLN(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민족해방전선)이 독립전쟁과 알제리내전의 중심에 있었고, 알제리가 여행주의국가가 된 것이 내전의 후유증이기도 한 바, ‘알제리내전’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알제리내전’은 1991년 실시된 총선으로부터 시작된다. 1962년 독립 이후 알제리는 사회주의를 채택, 석유자원과 군인출신 대통령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 65-78집권)’의 강력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랬던 부메디엔 대통령이 갑자기 숨을 거두면서 알제리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1980년대 내내 일당독재로 인한 부패가 심화되고, 실업과 유가폭락 등 경제가 악화된 것이다. 바닥없는 불황에 분노한 시민들은 1988년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이에 집권당 FLN이 다당제를 수용하면서 1991년 처음으로 자유총선거가 실시된다. 자원부국, 사회주의라는 차이만 있을 뿐 여기까지는 우리의 민주화역사와 비슷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총선 직전 이슬람은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라크 전)으로 세속주의와 근본주의로 분열되어 있었다. 알제리 국민은 정부에 대한 실망과 서구의 위협에 대한 반감을 총선으로 표출했고, 그 결과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야당 ‘ISF(Islamic Salvation Front, 이슬람 해방 전선)’가 80%의 의석을 장악한다. 사상 유래없었던 정권교체에 직면한 집권당은 군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군부는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하여 ISF를 강제해산 시키고 불법단체로 규정, 해체된 반정부 세력은 여러 지하단체를 결성하고 게릴라전에 돌입함으로써 알제리는 내전에 휩싸인다. 그 후 알제리는 1990년대 내내 외부와 고립된 채 전쟁을 벌였고, 이 시기를 ‘암흑의 10년 Black Decade’이라 부른다. 그 10년 동안 알제리는 외부세게와 완전히 단절되었고, 내전이 끝난 2000년 초반에 이르서야 외부와의 교류를 재개하게 된다.     


벤탈라 학살


알제리 내전동안 많은 학살이 있었는데, 그중 ‘벤탈라학살’은 마을주민 400여명이 무자비하게 희생당한 역사상 최악의 테러 중 하나로 기억된다. 학살자들은 1997년 9월 22일 밤 11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변두리 마을 벤탈라의 가가호호를 돌며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약탈, 강간, 살해했다. 사건 직후 보도에 따르면 벤탈라 학살의 주범은 휴전을 반대하는 과격단체인 GIA(Armed Islamic Group of Algeria 알제리 이슬람 무장그룹) 대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날 밤, 가까운 곳에 군부대가 있었음에도 아무도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학살의 진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더구나 최근 유럽 언론에 의해 내전기간 동안 반군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군부와 유럽의 정보조직이 학살을 은밀히 지원한 경우가 있었다는 증언이 보도된 바도 있다. 다소 선정적이라 할 이 기사들은 진실을 밝히려는 순수한 마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과거사 논란을 통해 알제리의 내정에 관여를 이어가려는 유럽인들의 욕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알제리내전 학살지도

    

알제리 내전은 1999년 대통령에 당선 된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대사면’ 조치를 반군측이 수용하면서 마침내 종식된다. 1965년 독립알제리 내각의 외무장관이기도 했던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대통합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85세로 건강이 좋은 않음에도 불구 현재까지 대체불가한 지도자로 재임 중이다.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에서 민주화 열풍(아랍의 봄)이 불 때, 유독 알제리가 조용했던 이유는 정부의 탄압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내분의 아픔을 지긋지긋하게 겪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편 대통합에 반대한 일부 반군들은 무장조직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알카에다 마그레브지부(AQMI)’의 시작이다. 그들은 동부 ‘카빌리 산악지대’나 사하라 사막 주변의 ‘사헬 지대’에 본부를 두고 정부나 외국인을 상대로 간간히 테러활동을 벌여오다 스스로 알카에다 지부로 개명한 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알제리가 지난 20년 간 외부세계와의 교류에 노력해왔음에도불구 여행주의 및 금지국가로 남아 있게 된 이유이다.

특별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알제리 내에서 학살에 대한 진실공방은 금기사항이라는 사실이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어렵게 되찾은 안정에 대한 간절함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80년의 광주’를 모르고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역적 정서를 이해할 수 없고, 반대로 그 역사만 놓고 우리를 판단해서는 곤란한 것과 마찬가지로, ‘알제리내전’과 ‘벤탈라의 성모’는 오늘날의 알제리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할 역사이되, 그것으로만 그들의 정치적 현상황을 판단할 수는 없다. 씻을 수 없는 상처 앞에서 겸허하게 같은 상처를 떠올리는 것이 여행자의 도리일 것이다.

직접 상처를 씻어줄 수는 없지만 아픔을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고 한 발짝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니... 역사는 공감의 도구요, 공감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임을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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