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로컬버스에서
오늘은 폰사반에서 비엔티엔으로 이동해 밤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어제 미리 여행사에서 아침 6시반 버스표를 사두었다. 비수기라 외국인 여행객이 적어 가장 비싸고 쾌적한 '미니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는 관계로 '대형버스'를 타야한다고 했다. 어제 항아리평원 데이투어도 혼자했기에 상황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저렴한 '로컬버스'도 있지만 여행사 사장 왈 그건 현지인들만 타는 낡고 불편한 버스라며 고개를 가로저였다.
문제는 툭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행사에서 표를 살때는 대형버스표를 샀는데, 나를 픽업한 뚝뚝이가 어이없게도 로컬버스 터미널에 내려놓고 가버린 것이다. 그는 아마도 미니버스가 운행하지 않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비싼 돈 내고 개고생하게 된 이유이다. 버스가 출발한지 한참 지난 지금에야 로컬버스가 뭔지를 실감하고 있지 그전까지는 뭐든 타고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툭툭기사에게 따져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차종은 오래된 현대 승합버스. 내부는 더럽진 않지만 매우 낡았고, 안전밸트는 가위로 다 잘라낸지 오래였으며, 차장 썬팅은 뿌옇게 바래 밖이 보이지 않고, 앞유리는 내 스마트폰 액정처럼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아... 만만치 않은 11시간이 되겠구나... 그런데 출발 시간이 다 되도록 승객은 나 혼자 뿐. 나 하나 태우고 11시간을 가서 수지가 맞나 걱정스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기우에 불과함을 알게되었다.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난 지금, 버스의 차 안과 지붕은 사람과 짐으로 꽉 들어차 있다.
라오스의 로컬버스는 장거리를 운행하지만 정류장이 따로 없다. 집 앞에 사람이나 잠이 나와 있으면 무조건 차를 세우고 태운다. 집 앞에 서는 시외버스 시스템이다. 이해를 위해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7,80년대 수준의 도로 위를 달리는 시외버스가 마을버스 겸 택배까지 해결하고 있다 하겠다.
사람만큼이나 많은 짐이 계속 실린다. 각종 자루들과 봉지와 배낭 심지어 작은 민물고기를 담은 스치로폴 박스는 물론 서류봉투까지 안받는 것이 없다. 짐들이 통로를 막아 승객들이 탈 수 없게되면 적당한 기회에 운전기사와 안내양이 짐들을 빼 지붕으로 올린다.
32인승 차가 2시간만에 만원이 되었으므로 최소 20번이상 섰다는 것이고, 짐만 실은 경우도 열번은 되므로 최소 30번 정차다. 11시간 동안 산을 넘어 마을을 만날 때마다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마을에 들어선 버스기사가 경적을 울려 버스가 왔음을 알리면, 슈퍼나 집앞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나와 차에 올라탄다. 한 마을에 대개 두세번씩 차를 세우는데, 마을 간격이 멀어지는 산길이 그나마 길게 달릴 수 있는 구간이다.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다. 차창은 뿌옇게 낡은 선팅때문에 밖이 흐릿하게 스쳐지나고, 오토도어라는 스티커가 깔끔하게 붙어있는 출입문은 수동으로 열기 편하게 덜 닫힌채로 달린다. 운전기사는 나와 눈이 마주칠때마다 맛이 어때요 하듯 수줍게 웃는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 중에 앳된 안내양만이 출발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돈도 받고, 짐도 싣고, 좌석도 정리하고, 심지어 주인없는 짐을 하나하나 다 기억해 집 앞에 내려주기까지 한다. 더운 날씨 장시간 고된 노동이건만 단 한번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이 오히려 씩씩하고 활기찬 기운을 차안에 불어넣는다.
신기한 것은 계속 사람이 타는데도 자리가 없어 타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 붙어붙어 앉다 자리가 꽉찬 것 같다가도 어디선가 계속 자리가 생긴다. 접혀있던 작은 의자를 내리기도하고 안내양은 자신이 앉았던 라지에이터 자리도 승객에게 내준다. 더 이상은 못태우겠구나 할때 내리는 사람, 도착할 짐이 나와 절묘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로컬버스의 마법이다.
옆 자리에 꽃단장한 아가씨가 앉자 운전기사의 어깨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룸미러로 보인다. 이로써 졸음운전 걱정은 없어졌지만 왠지 급브레이크가 더 잦아지고 있다.
빵앙~ 하고 다시 경적이 울리는 것을 보니 마을인가 보다. 이번엔 또 어떤 마을일까. 누가 타고 내릴 것이며 또 어떤 짐이 올라올까. 길과 마을, 사람과 짐이 모두 흥미롭다. 엉덩이와 무릎은 얼얼하지만 그럴수록 같이 타고가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과 하나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운전기사의 달뜬 마음 사라져가고, 지친 승객들은 잠이 들고, 버스는 계속 달린다. 아직 먼 길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한 중에 드디어 도시가 나타난다. 이름만 들어도 힘든 '빡싼 '. 승객들을 휴게식당에 내려준 현재시각은 2시 34분. 버스비에 포함된 국수 한 그릇을 정신없이 흡입하고, 힘든 중에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어준 운전기사와 안내양에게 라오스 바카스를 건넨다.
빡센 여정은 '빡싼'까지. 여기부터 비엔티엔까지는 일자로 뻗은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며 사람과 배달짐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간다. 오랜만에 자리에 앉은 안내양은 나 보란듯이 바카스를 조금씩 음미하며 마시고 있다.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밥을 먹어서인지 버스 안이 화기애애하다.
아직 4시간을 더 가야한다. 비싼 돈주고 힘들게 돌아가는 길. 라오스 사람들이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성품을 가졌는지를 진하게 느낀다. 먼지와 짐이 뒤섞인 낡은 차 안에서 7시간동안 그 누구도 짜증내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모습만 보고 그들의 미래는 밝다느니 어쩌니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불행이나 좌절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속에 함께 끼어있는 나에게도 그 기운이 전해진다. 이 모든 것이 물정 어두운 툭툭기사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여행에서의 실패와 실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P.S
현재시각 오후 5시. 비엔티엔 버스터미널로 들어가고 있다. 모든 승객과 짐은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지고, 버스에는 출발 때처럼 운전수와 안내양, 그리고 나만 남았다. 정류장 하나 없고 헐렁해보여도 낡은 로컬버스는 빈틈없이 할 일을 다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