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6코스 - 출판단지길
DMZ 둘레길 중간점검
김포와 고양을 지나 파주로 접어든다. 중간점검을 할 타임이다. ‘평화누리길’은 총 12구간이었다. 김포 3구간, 고양 2구간, 파주 4구간, 연천 3구간이고, 근래 철원 구간이 추가되어 현재는 총 13구간이다. 거기에 양구에 별도로 펀치볼 둘레길이 4구간이 있고, 최근 비무장 지대 안으로 들어가는 ‘DMZ 평화의 길’이 고성(4월), 철원(6월), 파주(8월)에 생겨 전방지역 둘레길이 어느덧 총 20구간이 되어버렸다.
12개 구간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끝이 더 멀어지는 느낌, 많이 온 것 같은데 여전히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 남북평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밀려오는 그 딱 느낌이다. 종착지가 아득해질 때마다 초조해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있다. 과정을 즐기는 것이 끝까지 가는 최고의 비결임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며... 파주구간의 시작인 6코스를 돌아본다.
뒤늦게 알아 본 심학산
6코스는 심학산 둘레길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등산이다. 지난 번 말했듯이 5코스의 종착지는 대중교통 전무한 황량한 동패지하차도. 6코스의 스탬프 부스는 그 지하차도 위에 있다. 정확하게 고양과 파주의 경계에 세운 공무원들의 고지식함은 맘에 들지 않으나 부스 주변의 관리가 세심해 보였다. 고양보다는 파주가 평화누리길을 의미 있는 사업으로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파주야 말로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고, 임진각, 도라산역, 판문점 등 분단과 평화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반나절 5코스를 걸으며 몸보다는 마음이 피곤한 상태인 탓에 갑작스런 등산이 반갑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걷고 보니 이 산 매력 있다. 높이가 200m가 채 되지 않는 야트막하고 완만한 산길인데 걷다보면 제법 깊은 산중의 정취가 느껴진다. 곳곳에 커다란 바위들도 있고, 전망도 한강을 향해 툭 터져있다. 아주 오래 전에는 밀물 때나 비가 많이 올 때 이곳까지 물이 차올라 산이 섬이 되었다고 하는데, 전망대에 서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도 컸다.
심학산이라는 이름은 영조 때 궁중에서 기르던 학이 날아가 버렸는데 이곳에서 찾았다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학을 애완동물로 사육하려 하다니... 봉황과 임금인 자신을 동일시 한 영조의 자아도취적 성향이 읽혀지는 가운데, 어느 날 아침 빈 새장을 대면했을 담당자의 낭패와 절망이 얼마나 컸을 지를 떠올렸다.
한양과 경기도 일원에 임금의 날짐승을 찾으라는 특명이 떨어졌을 것이고, 장식이나 금테 같은 포식이 있었던지 그것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얘기. 정황상 빈틈이 엿보인다. 물론 이곳은 궁궐의 학이 이곳에 나타났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습지가 많고, 지금도 어렵지 않게 학을 볼 수 있어 누군가 금테를 두른 학을 발견하는 횡재를 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학이란 동물이 생김새나 움직임으로는 이놈저놈이 가려지지 않는 고로, 여러 마리의 학을 포획한 후 크기와 생김새가 비슷한 놈에게 표식을 달아 그 놈을 찾았다고 했을 가능성을 떨칠 수 없다. 산중의 큰 바위들은 도를 수행하는 도인들이 많았을 것임을 암시하고, 더군다나 이곳은 황희와 율곡의 고장이니 그 정기를 받고자 한 유생들도 적지 않았을 터. 그깟 학 한 마리, 혹은 한 쌍 때문에 행정력을 낭비하는 꼴을 보다 못해 누군가 임금을 상대로 발칙하면서도 대담한 장난을 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산을 넘었다.
산을 넘고 보니 심학산은 파주출판단지 뒷산이었다. 6년 전 이곳에서 일할 때 옥상에서 담배로 과중한 업무를 견디며 매일 바라보던 그 산이 바로 심학산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뒷산은 고사하고 동네 한 바퀴 둘러볼 여유 없이 보낸 6개월이었다. 어디 뒷산 뿐이랴. 조바심치며 사는 중에 모르고 스쳐간 좋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지.
파주의 매력
6코스는 출판단지를 굳이 둘러보지 않고도 바로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 좋았다. 평화누리길의 특성상 지역명물을 자랑하기 위해 여행자를 돌아가게 할 필요가 없음을 이 구역 설계자는 잘 알고 있었던 듯. 종주여행자에 대한 배려를 느끼며 출판단지를 빠져나올 즈음, 이 구간의 매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풍광을 만났다. 습지와 새들, 출판단지와 심학산이 마침표를 찍듯 모여 있다. 그 풍광 앞에 서서 오래 전 알아보지 못했던 파주의 진면목을 제법 길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던 누리길은 습지 위에 펼쳐진 공릉교와 군부대 철책을 넘어, 파주축구국가대표 훈련원 뒷길을 지나, 살레길이라는 또 다른 숲길로 이어진다. 두 번째 등산로이지만 이 길 역시 걷기 좋은 길이다. 소나무 사이 오솔길도 좋고, 건너편으로 보이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의 모습도 새롭다. 5코스와 6코스를 이어 걷느라 몸은 지쳐 있었지만 유난히 다채로운 풍경 덕분에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남수단에 파병을 갔던 친구가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는 탓에 서둘러 걷느라 온전히 그 길을 다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6코스 출판단지 길에서 본격적인 평화누리길은 시작되고 있었다.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보니 아늑하면서도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이게 파주의 매력인가? 파주가 이런 곳이었던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정이 즐거워 먼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 길, 언제라도 누구와든 다시 걷고 싶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