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열일곱 봄에 만난 꼬마철학자와 꼬마망니니는 스무 살 1월에 연애를 시작했고, 스물다섯이 된 지금까지 여전히 연인이라는 이름 하에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연애는 2015년 1월 18일 새벽, 각자의 스무 살 1월에 시작됐다.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과 스무 살이라는 시기는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기에 꽤나 좋은 조합이다. 심지어 그게 ‘연애’의 시작이라면 더더욱. 낯간지럽지만 원래 연애라는 건 끊임없는 의미 부여의 과정인 법이니, 조금 의미 부여를 해보자면 애인과의 연애는 내 20대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아마도) 끝을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스무 살이 되었다는 건 그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나이’라는 계단을 한 칸 올라선 것뿐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뿅 하고 외모가 바뀌는 것도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른스러운 생각과 말투를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고등학교라는 좁은 공간과 입시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벗어나, 좀 더 벌거벗은 상태로 이런저런 자유라는 이름의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스무 살이 가지는 특별함은 이 정도이다.
오히려 좀 더 특별한 건 스무 살 '그 이후'라 생각한다. 발가벗은 상태에서 무엇인가 선택을 하고, 학생과 사회인의 중간 단계에서 한껏 어른인 척하는 어리숙한 인간이 되어 갖가지 시련과 성공을 반복하며 각자의 삶을 꾸려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어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크고 작은 일탈을 하고 고집이 생겨나고 좋고 싫음이 점차 명확해진다. 결국 특별한 건 '스무 살'이라는 점이 아닌 스무 살 '그 이후'라는 선이다.
그래서 스무 살과 연애의 시작이 같았다는 건 '그 이후'라는 선을 촘촘하게 모든 점들을 함께 그려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스무 살 '그 이후'라는 무대에서 서로가 주연일 수도, 조연일 수도, 설령 나무 1에 불가한 엑스트라일지라도, 빠지지 않고 출연했다는 뜻이니까. 이건 부모님도 친구들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셈이다.
사실 이런 장대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4년째 만나는 날, 정말 '어느 날 문득' 애인과 보낸 시간들이 ‘20대 초반’이라는 내 인생의 한 덩어리를 차지한다는 걸 깨달았다.
연애의 특별함도 스물의 특별함과 마찬가지이다. '시작'이 아니라, 연애 시작 '그 이후'라 생각한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쌓아온 '그 이후'는 연애란 어떤 것인지, 연인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어떤 애정표현을 좋아하고 어떤 관계를 깊은 관계라 여기는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주었다.
갓 성인이 된 두 스무 살은 스무 살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해왔다. 덕분에 세상 모든 이들의 사랑은 논할 수 없을지라도 '나'라는 사람의 사랑은 논할 수 있는 정도의 '짬'이 생긴 셈이다. 사랑은 교과서와 문학으로 접한 이론들을 현실로 가져와 이리저리 테스트해보고 드디어 어느 정도 실무자라 칭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20대의 절반을 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 건 사랑뿐 아니라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 오랜 기간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그의 시선에서 나를 기록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꽤나 큰 힘이 된다. 나도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누군가의 행동과 말을 좇고 그의 행복과 성장을 바란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함께 하는 법을 알아가되 동시에 혼자만의 단단한 뿌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나는 이 관계가 꽤나 마음에 든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가 나눈 대화들이 서로를 만들었고 또 앞으로의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겠지. 나의 연애 이야기는 팔불출의 애인 자랑하기보다는 20살부터 지금까지 차근차근 쌓아 올려진 '나'라는 사람의 성장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삼 이 순간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언제나 순간은 흩어지고 기억은 흐릿해진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순간은 너무도 쉽게 기억 저변에 흩어지고 기억은 조금씩 조금씩 흐릿해져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죽은 기억이 되어버린다. 나는 가끔씩 이 당연한 순리가 못내 아쉽곤 하였다. 그 순간과 기억이 꽤나 소중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지금부터 조금씩 순간들을 모으고, 떠올리려 애쓰고, 기록해보려고 한다. 스무 살부터 함께 한 5년의 연애라는 나름 로맨틱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아마 이 글들은 연애편지라기보단 일기에 가까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