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게와 대게의 구분이라던가, 게 다리를 가위로 자르고 살을 기다린 게 포크로 끄집어내는 방법, 또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는 게 맛있다는 것은 전부 사돈 부인에게서 배웠다.
사돈 부인, 이라니, 내 자식이 결혼을 해서 사돈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닌데, 내게 사돈이 있을 리가.
13살에 오빠와 결혼한 새언니의 엄마, 즉 내 부모님과 사돈 관계에 있는 사돈 부인을 나도 ‘사돈 부인’이라고 부른다. 보통은 멀고 먼 사이지만 우리들은 다른 친척보다 훨씬 가까웠다. 내게 호칭이 마땅치 않아서 친구들에게 그녀를 언급할 때는 ‘사돈 부인’이라 칭했다.
대학 2년을, 칠곡 사돈 댁에 얹혀살았다. 그때 도시 문화와 새언니의 가족 문화를 한꺼번에 흡수한 시절이었다. 우리는 보통 내 가족을 떠나기 전, 혹은 친구의 집에 가기 전에 우리 집의 문화가 다르다는 걸 깨닫기 어렵다. 클레어 키건<맡겨진 아이>에서 아이의 문화적 충격과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감정적 수그림이 가장 먼저 온다. 기가 죽는다. 내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경험 자체가, i 형인 내겐 큰 스트레스였다. 표현하기보다 숨죽이고 있는 걸 더 편했던 나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한 지긋한 노력을 2년 동안 했다. 그건 사돈 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와는 별 게다.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한 적이 거의 없다. 해 봤자 짜장면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부산 식당에 데려가서 탕수육을 시켜주는 것. 그런데 부산 식당에는 내가 싫어하는 비계를 짜장면이나 탕수육에 넣었다. 자장 소스에 숨은 검은 비계가 물컹 씹혔고, 탕수육 튀김옷을 아래 설컹 씹히는 돼지비계는 입맛을 내쫓았다. 그 이후로는 안의 갈비탕을 먹으러 간 게 전부일까. 엄마가 겨울이면 오징어 국과 꽃게 탕을 끓이고, 미더덕 찜을 만들고 또 꼬막을 삶았다. 그게 나의 유일한 미식의 기회였다. 산촌 시장에 산 해산물로 아버지의 입맛에 맞춰 해냈던 엄마의 부엌, 소박하지만 그 부엌이 부산식당이나 안의 갈비탕보다 더 식욕을 충족시켰다.
사돈 댁에서는 된장찌개를 많이 먹었다. 몇십 년 후에 그녀가 된장을 좋아한다는 걸 들었기에 그걸 상기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에도 라면을 끓여주는 이상한 것 이외에도, 거제도에 살았던 경험으로 아귀찜을 자주 했다. 엄마의 부엌에서 먹어보지 못한 돔베기를 넣은 지짐 찌개도 명절이 끝나면 꼭 먹었다. 굴비도 자주 먹어서 그 비린내와 된장 냄새가 늘 부엌을 진동했다.
사돈 부인은 외식을 자주 했다. 얹혀사는 나를 꼭 빼고 갈 수도 있었지만, 꼭 나를 챙겼다. 우리의 외식 장소는 호동이 숯불갈비와 해산물찜이었다. 대학생 아직도 크고 있다고 믿었던 나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짐승 오빠들 틈에서 살아남으려고 음식을 마구 집어넣는 걸 어느 순간 터득했고 그 버릇이 남아있었다. 나는 많이 먹었다. 고기를 2, 3인분을 먹고 나서, 된장국에 밥 한 그릇, 아이스크림까지 든든히 먹었다. 사돈 딸인데도 그 돈을 다 내주셨으니, 그렇게 넉넉한 분이 있으실까. 나는 우리 집에 와서 자주 밥을 먹는 아들의 친구가 좀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말이다.
호동이 숯불갈비는 칠곡 집 앞에 있었다. 너른 주차장이 손님이 많을 때는 가득 찼다. 경산에서 강의를 마치고 바로 오라는 새언니의 말을 듣고, 종점에서 내려 헐레벌떡 식당으로 뛰어갔다. 어두 컴컴해진 봄밤이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이미 달달한 숯불갈비 향이 났다. 주차장 자갈은 빨리 뛰어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자꾸 미끄러졌다.
“숙아, 어서 와. 얼른 거기 앉아.” 사돈 부인의 빨간 립스틱 바른 입술이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깐 갈비를 쏜다.”
그녀는 기분파였다. 그냥, 기분이 좋으니깐 외식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고, 사람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다. 보통은 그녀가 외식비를 결재했다. 기다란 상에 앉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눈치를 봤다. 고기가 나오면 눈치를 봐서 고기를 구우면 되지만 아직 그런 걸 배우지도 잘 못하는 막내였다. 내가 꾸물거리고 고기를 잘 못 구우면 그 집 아들 사형이 내 가위와 집게를 빼앗아 들었다.
“고모야,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여 줄게. 잘 봐. 이런 건 내가 잘하지.”라며, 넉살 좋게 가위를 집어 들었다. “고모야, 공부한다고 요즘 힘들지. 많이 먹어.” 살가운 말을 잘하는 그는 그 엄마의 그 아들이다. 그렇게 성격 좋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안 봐도 될 눈치를 보며 잘 구워진 갈비를 한 점 먹었다. 그 순간은 눈치를 잊었다. 정신없이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나서 젓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식사는 뭘로 할까?라는 질문에 뒤로 짚고 있던 손을 떼고 벌떡 일어났다. 배는 불러도 그것마저 먹고 싶었다. “저는 냉면 한 젓가락.” 그것을 먹고 나면 삼색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참 많이도 먹었다.
다시 영덕 대게로 돌아온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시골에 계신 아버지와 엄마도 함께였다. 영덕까지 대게를 먹으러 우리 식구와 사돈 식구, 조카까지 행차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신 내 부모님은 외식처럼 여행을 한 적도 없다. 맛집 투어라고 하는 것도 해 본 적이 없다. 있었다면, 차로 몇 분 안에 있는 농월정이나 얼음 골, 동호정 같은 물 좋은 곳에 가서 민물고기 회나 추어탕을 먹었다. 세상에, 차를 타고 대구에서 영덕 까지라니. 나는 그냥, 기분이 좋았다. 가족 여행을 하는 것 같았으니깐.
아직도 대게 거리를 걸으면서 어느 집에 들어갈 것인지 눈에 선하다.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바닷가에 늘어선 식당에 입구에는 큰 양은솥이 있었다. 거기서 김이 났다. 김에서 대게 찌는 향이 거리로 쏟아졌고 내 코에도 들어왔다. 어느 집에 들어가니 이층 식당 홀에서 바다가 들어왔다. 재밌는 건 테이블마다 얇은 비닐이 깔려 있었다. 치우기 편리하라고 하는. 방석을 하나씩 가져와 우리 가족이 줄줄이 앉았다. 들뜬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구경하기에 바쁜 우리 가족, 그 와중에 기분파 사돈 부인은 들떴다.
“자, 여기 경치가 죽이지요?” 원래 교양 있는 분이라 그런 말을 지양했지만, 우리 경상도 사람들의 무뚝뚝함을 맞춰주기 위해서 말했다. 입술을 잘 바른 그녀의 입술이 웃었다. 그리고 눈을 깜박거리면서 우리를 둘러봤다.
“여기 오니 너무 좋다. 오늘은 제가 쏠게요.”
“아, 저 양반이 무슨 소리 하노. 이건 우리가 낼 거예요.” 엄마가 얼른 받아쳤다. 운전을 해주고 좋은 구경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몰랐던 엄마는 아버지와 상의해서 그렇게 식사비를 지불하리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신세를 지거나, 누군가의 대접을 받으면 꼭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마음을 베풀었던 부모님이다. 게다가 2년 동안 딸을 데리고 있지 않았던가. 쌀이나 김치나 농산물을 가을마다 보내는 것은 당연하고 이런 일에서는 당연히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면 우리 오늘 좀 거하게 먹어볼까나.”
라고 사돈 부인이 말했다.
“일단 제가 좀 먹어봤으니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요.” 그때 위풍당당하게 몸통과 다리를 자른 대게가 등장했다.
“위생 장갑을 끼고, 가위를 이렇게 잡고 겉에 죽,,,, 가위질을 하세요. 그리고 이 쑤시개로 밀어요. 그럼 딱하고 맛있는 살이 예쁘게 나오죠?”
과연 그러했다. 세상에 내가 대게를 먹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런 돈도 없을뿐더러, 있어도 비싸서 감히 사 먹을 생각을 못 했을 거다. 사돈 부인은 즐기는데 돈을 쓸 줄 알았다.
“숙아, 이거 봐. 내가 뺀 살 네가 먹어라.”
냉큼 그걸 받아먹었다. 오양 맛살도 엄청 좋아하는데, 정말, 대게 맛은 천국이다. 관자놀이 뒤로 확 밝아졌다. 뇌에서 엔도르핀이 터졌다. 그걸 얼마나 먹었을까. 그리고 해파리 무침, 부침개, 샐러드 등도 다 먹고 배가 불렀을 때, 게딱지 비빔밥이 나왔다. 아니, 비빔밥? 그렇다. 닭갈비를 먹고도 비빔밥이 나왔는데 게를 먹고도 그런 비빔밥이 나왔다.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걸 맛있게 먹었다는 것뿐.
그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내가 부모님과 사돈 부인과 함께 맛집 여행을 갔던 마지막. 그 후 나는 해외 유학을 갔고 독일 남자를 만나 독일로 왔으니. 이것도 아주 먼 옛날이야기다. 다만, 나는 이 기억을 꼭 적고 싶었다. 얹혀살아서 기죽었던 나의 마음과 달리 나를 기꺼이 데리고 살았던 너그러운 사돈 부인의 마음,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 그리고 립스틱을 잘 바른 그 웃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