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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Feb 26. 2024

빈약한 가슴

작은 여자 가슴에 대해서 


가끔 야한 꿈을 꾼다. 흐뭇하게 상대와 키스를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멈춘다. 없는 가슴을 보여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수영장을 가거나 대중목욕탕을 가지 않는 이상 가슴 크기란 눈에 띄지 않지만 아직까지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무의식 깊이 숨겨진 ‘가슴이 없다’라는 생각은 참으로 무섭다. 


‘가슴이 없어서’ 혹은 작아서의 기준은 밖에서 온다. 특히 남성은 가슴에 집착하니깐. 가슴 그게 뭐라고. 여성성의 상징처럼 내세우는지. 어릴 때 엄마 젖을 못 먹은 한국 남성들이 그렇게 많은 걸까. 아님 가슴 큰 여성이 나오는 외국 야한 비디오를 많이 봤는가. 아님, 여자들 스스로도 큰 가슴을 선호하는 것일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보고 평가하는 잣대가 우리 여성의 것이 된 것이 아닌가. 


중학생 시절, 가슴이 작아 절벽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절벽이라니, 절벽은 깎아지른 수직이 아니던가. 절벽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말랐고 가슴이 빈약했던 나는 그런 놀림을 중학 3년 내내 들어야 했다. 그 영향때문일까. 컴플렉스가 생겼다. 연애할 때마다 상대에게 내 몸을 보여주는데 무척 망설였다. 몇 번이나 가슴이 없다고, 정말 놀라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남자친구는 큰 가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거나 남자 친구는 내 가슴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와 애를 낳고 잘 살고 있다.  


어차피 동양 여자의 가슴은 서양 여자에 비할 게 아니라고 했다. 가슴 초음파 검사를 하러 가면 동양 여성의 가슴은 서양 여자의 지방이 비율을 차지하는 것과는 달리 치밀한 근육으로 이뤄져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서 빈약한 가슴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물론 예외도 있다.)



없는 가슴이 출산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는 정말 무슨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월드컵 붉은 악마의 소원 성취가 된 것 같이 들떴다. 모유 수유가 끝나자 부풀었던 풍선은 푹 꺼졌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영원히 꺼져버린 소망 같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여자로서 내 임무를 다 했고. 이제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할 기회는 드물고, 내 몸이 타인의 저울대에 오르는 일이 없는 나이다. 얼마나 홀가분한지.   



중학생 때 브라를 사러 갔다. 30% 할인 스티커가 상점 곳곳에 붙은 그런 속옷 할인 매장이었다. BYC에서 나온 메리야스도 있고, 아놀드 파마 양말도 있었다. 와이어가 없는 브라를 입을 때다. 들어가서 브라 사이즈를 고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옆에 서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왜.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가슴이 너무 작아서요.” “딸래마. 나 봐. 나는 한 개도 없어.” 그 아주머니는 오십은 넘어 보였다. 정말 평평한 가슴팍을 보여주며 웃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시원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괜찮아.”라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에 그 순간에 마음이 놓였다. 



그때 그 아주머니의 나이보다 어리겠지만, 나는 이제 그 아주머니처럼 가슴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에서의 가슴이 아닌 내 몸의 일부로서, 주인으로서의 관점이다. 먼저, 가슴이 작아서 편하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가슴이 무겁거나 걸리적거린 적이 없다. 그야말로 러너에게 적합한 가슴이다. 요가에서도 가슴이 크면 가끔 가슴을 열어주는 포즈에서 가슴을 한쪽으로 치워야 한다. 나는 그런 일이 없으니 거의 모든 운동을 하기에 최적화됐다. 



둘째, 처질 가슴이 없다. 엉덩이도 처지고 눈꼬리도 처지고 모든 것이 중력의 법칙으로 아래로 향한다. 언젠가 남편은 늘어진 가슴을 어깨너머로 던지는 할머니에 대한 농담을 했었다. 내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딱 달라붙은 젖가슴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볍게 걸을 수 있다.   


대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브라 대신, 브라 넌닝을 입는다. 가슴은 없어도 흉곽이 넓어 브라는 답답하다. 그 흉곽에 맞는 큰 사이즈 브라를 사면 앞에 남은 그 텅 빈 공간을 참을 수 없다. 나 자신이 공갈빵이 된 것 같다. 원피스 수영복 가슴이 조금이라도 파이면 그걸 바늘과 실로 몇 바늘 꿰맨다. 자연스럽게 수영을 하러 간다. 물에서 나오면 실체가 없는 가슴 부분이 찌그러진다. 좀 당황해도 물기를 짜주고 세워주면 감쪽같다. 


조금만 표준 기준에서 벗어나면 뚱뚱하다. 빼빼하다. 표준보다 나으면 또 그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일정한 기준에 목을 매는가를 반증한다. 유럽에 살면서 뚱뚱해서 살 좀 빼겠다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아시아 국가에 한한 그 획일적 기준은 , 개인은 집단을 생각하고 튀지 말아야 하는 집단적 사고에서 비롯한다. 그런 집단적 사고와  기준은 우리 개인 각각의 신체적 특징과 사상의 개성을 무시하는 기준이다. 그 문화에서 자란 나는, 아직도 그 기준에서 얽매인다. 엄연히 내 가슴인데, 내 것인데 누군가 내 가슴을 보고 평가할 것을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이제는 그런 평가를 개의치 않을 나이이며, 외국에 사는데도 말이다. 



가슴의 기능에 주목한다. 가슴에 멍울이 없고 건강해야 한다.(멍울이 생길 지방이 없다는 게 안타깝지만.) 건강한 가슴으로 존재하고, 겨우 남은 젖꼭지가 그 기능을 잘 해서 감각을 잘 느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내게는 미보다 기능이다. 없는 가슴을 부풀리는 수술을 하고 싶지는 않다. 몸의 다른 부위는 다 처졌는데 가슴만 봉긋하게 선 것은 큰 사이즈 브라에 텅 빈 공간을 보는 것처럼 이상할 것이다. 거짓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살은 없고 젖꼭지만 남은 내 빈 가슴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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