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 국민학교 점방 앞에서 소시장까지 죽 이어진 길을 종로라고 했다. 그 주변에 모여 살았던 아이들은 학교 분위기를 장악했다. 일명 종로 패거리들이다. 종로에는 읍의 중심답게 피아노와 미술, 태권도 학원이 있었다. 종로의 아이들은 일찍이 그런 학원을 다니면서 교류하고 엄마들끼리도 친했다. 하교 후 매일 만나서 놀면서 친해지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이었다.
나는 읍내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 살았다. 하교 후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래서 종로 패거리에 끼지 못했다. 하교 후 바로 집에 갔고, 우리 동네에는 나 이외에 또래 아이가 없었다. 다른 외곽에서 온 아이들은 각 구역 출신의 친구들과 놀았다. 친구 없는 나를 종로 애들은 어릴 때부터 놀렸다. 3년 반은 지속되었다.
3년 반 후, 그제야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했던 나는, 뜬금없이 그 중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당하는 게 지겨웠다. 또 종로 패거리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깐,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과 학우들의 관심이 돌아갔다. 그때부터 나는 시험이 닥치면 전과를 외우다시피 공부했다. 몇 달만 해도 반 학기만에 전교 몇 등(그때는 100명도 안 된 작은 시골 학교)에 들 수 있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깜짝 놀랐다. 그 반응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런 놀라게 하기는 독서, 체육 그리고 학급 위원에게도 범위를 넓혔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임 반장’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릴만한 모범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어깨를 좀 펴고 다니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종로에는 치맛바람이 셌던 엄마들의 딸들이 있었다. 남정이, 소연이, 정은이, 지혜 등등이다. 그중에서도 남정이 엄마는 도시락 반찬으로 진주햄을 싸줬다. 남정이는 그 반찬이 지겹다며 나 같이 풀 반찬만 싸 오는 아이들에게 선심 쓰듯이 나눠주곤 했는데, 자랑하기 좋아하는 남정이가 어느 날 “우리 집에 피아노 들였어.”라고 공개적으로 뽐냈다.
소연이와 정은이, 지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들은 모두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실력으로는 지혜가 가장 뛰어났지만, 가정 형편은 남정이가 가장 좋았다. 피아노를 들여놨다고 해서,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해서 방과 후에 친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을 따라갔다. 짙은 갈색 양옥 벽돌집에 새시 창이 있는 집 거실 한가운데 검은 피아노 한 대가 서 있었다. 영창 피아노이었다. 칠지도 모르는 내게는 특별한 물건이 아니던 그것이 그들 무리에게는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종로 패거리들의 엄마들은 먼 동네에 사는 내 엄마보다 교육열이 높았다. 새 학기 담임선생님이 정해지면 무리들의 엄마들은 언제나 꽃화분과 먹을 것을 사 들고 선생님을 찾았다. 그 화분 아래 흰 봉투를 넣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명절 인사로 그들 무리는 선생님께 작은 선물이라도 했을 것이 분명했다. 내 엄마는 외딴 마을에 사는 것처럼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학부모님께 대접받은 선생님도 그런 학생들을 눈여겨보고 더 잘해주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남정의 엄마가 교육열의 핵이었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놀고 있으면 남정이 엄마의 실루엣이 정문을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그날은 군대회에 나갈 100미터 선수를 선발하는 달리기 대회가 열렸다. 우리는 4학년이었다. 달리기를 잘하는 애들 중에 혜영이, 미진이, 나, 남정이 있었다. 혜영은 우리 중에 다리가 제일 길었다. 숨도 안 차는 듯이 달렸는데, 악을 쓰고 달리는 나를 당할 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미진이는 뒷심이 좋았다. 계주에서 꼭 나와 마지막 스파트를 겨뤘다. 때에 따라 내가 이기기도 미진이가 이기기도 했다.
남정이는 다리가 우리 중에 제일 짧았지만 낮게 달리는 승용차 같았다. 안정적이면서 빨랐다. 나는 그녀를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한 해마다 내 키가 그녀 키보다 더 커졌다. 그래도 그 낮은 중형차를 이기기에는 역부족. 4학년 때 내 성적이 최상위였고 최초로 부반장이 되었던 해였다. 나는 여세를 살려 군대회에 나가 내 달리기 실력을 뽐내고 싶었다.
여러 번 달렸고 결승에 우리 넷이 남았다. 지쳤지만 이번에는 기어코 이기고 싶었다. 뛰다가 걸리적거리는 운동화는 출반선에서 벗었다. 학교 왼쪽 운동장 끝에서 오른쪽 운동장 끝까지 새로 흰 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발뒤꿈치를 세우고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튀어나갔다. 중간쯤 달리자 내 바로 옆에 있던 남정이의 어깨와 발달된 턱이 보였다. 애쓰는 모습이 연연했다. 나는 죽을힘을 다했다. 결승 라인에서 나는 좀 더 힘을 내서 골인. 처음으로 남정이를 이겼다. 간발의 차이였다. 분명히 내 무릎이 그녀보다 더 앞섰다. 미진이도 그걸 보았다.
나의 담임, 노점자 선생님이 일등이 아닌 이등 남정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자기 쪽으로 끌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두리번거리는데, 미진이와 혜영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노점자 선생님은 잘했다며, 남정이가 군 대회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쌤, 그런데 제가 일등 했는데요.” “너는 자세가 약간 비틀어졌어.” “네?” 한 번도 못 들어본 말이다. 자세가 바르지 않아도 잘 달리는 사람이 대회를 나가야 하는 게 공정한 게 아닌가. 선생님은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잘해도, 그 배후에 숨은 뇌물을 이기는 못 하는 거라고.
심증만 아니라 증인도 있었다. 5학년 때, 나는 결국 반장이 되었다. 그런데 수학은 혼자 공부하기에 어려웠다. 어쩌다 미를 받았는데, 그 해도 담임이었던 노점자 선생님이 수업 후 시험 점수를 매기는 일을 도와 달래서 갔다. 바로 옆에서 선생님은 내 이마를 쥐어박았다. “반장이라는 놈이 너는 수학 점수가 이게 뭐야.”(백 점 만점에 43점) ‘내 엄마가 노점자 선생님에게 선물이라도 줬더라면, 혹은 한번 전화 인사라도 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을까.’ 선생님은 성적은 나쁘더라도 남정이 같은 아이가 반장이 되어서 학부모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엄마한테 선생님에게 뭔가를 드려야 한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엄마는 “쟈가, 무슨 소리 하노.”라고 받아쳤다. 그래, 그건 안 됐다. 명색이 반장인데 아무튼 엄마가 올바른 방식으로 담임 선생님에게 어필을 해서 학교에서 내 위신이 좀 섰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다. 그랬다면 내가 군 대회에서 100미터를 뛸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나는 투포환과 높이뛰기로 군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시골 학교에서는 종목에 맞춰 학생들 이름만 넣었다. 훈련 없이 명색만 갖춰서 대회에 참가한 덕분에 나도 대회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만약에 100m 선수로 발탁돼서, 훈련을 하고 참가했으면 군에서 이름을 날려 전국체전에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막상, 군대회에 가보면 선수들의 옷차림부터 달랐다. 날렵한 스파이크를 신고 쇼트 팬츠를 입고 달리는 그들을 따라갈 산촌 출신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공정하지 못한 선생님이 나의 기회를 박탈한 것 같아서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