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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흔적

by 원더혜숙

봄이 오기 전에 수선을 떠는 지빠귀처럼 나는 콩콩 뛰어서 숲으로 갔다.

딱따구리가 우듬지 근처에서 나무를 두드리면 다른 나무들에 전도되어 숲 전체가 울렸다.

"꽃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


나는 꽃을 이리저리 보아야 아름답고 말하련다.

가까이서 아래서 위에서 사진을 찍어서도 보고 햇빛에 비춰도 보고 이름을 찾아보기도 하고 다시 본다.


봄날, 처음 눈에 들어온 꽃은 모두 예쁘다. 배 부른 우리는 좀 더 예쁜 놈을 찾는다. 좀 더 완벽한 꽃잎을, 좀 더 활짝 수술을. 꽃 줄기를 꼿꼿이 올리고 이파리마저 잘 갖춰진 것, 즉 완벽에 가까운 것을 찾아내고야 만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을 찾는 게 우리 본능이다.

올해는 가까이 가서 본다.

작년에 봤던 엥초꽃도 코 앞에서.

노루귀도 초근접해서.

독일 숲에서는 흔해서 천대받는 노루귀.

여섯 개 꽃잎이 완벽에 가깝게 폈고, 수술도 햇빛을 향해 쭉 뻗었다.

쐐기풀마저 애기일 때는 보송보송한 게 귀엽다.

아기 사자의 앳됨 같다.

공원을 찾았다. 공원의 시냇가에 창포가 자란다. 물이 차가워 한 여름에도 발을 넣기 꺼려지는 이곳에는 창포가 잘 어울린다. 말끔히 면도한 공원은 서서히 수염처럼 풀이 자라고 그 위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햇빛 아래서 춤을 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니 이렇게 아름다운 봄의 시작을 보여준다.

매일 보았던 이 새벽을 지금은 매일 볼 수 없지만, 스쳐 지날 때마다 사진으로 남긴다. 봄에 핀 꽃이 정말 아름다워서 꽃으로 보인 걸까. 아니면 내가 그 꽃을 보아서 아름다운걸가. 새벽도 내가 볼 마음이 있어야 보인다. 새벽 공기를 받아들일 자에게 축복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조깅에서 자연이 내게만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빗물이 햇빛에 비치면 눈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야생 버들 잎꽃이 물에 젖으면 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쪽이 기울어지고 볼품없지만 햇빛에 반사되는 나뭇가지를 혼자 간직하고 싶은 비밀처럼 본다. (사진에서는 절대로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는.) 천사가 앉은 자리라고 할까. 단테의 <신곡>은 신성한 빛으로 가득했고 천사가 등장할 때 저런 빛을 비췄다.


가문비나무의 등에는 털이 하나도 없다. 앞머리만 많다. 옆알머리로 정수리를 가린 대머리 아저씨처럼. 다른 나무들의 등살에 못 이겨, 나무는 햇빛을 받지 못한 곳에는 자연스럽게 이파리를 떨어뜨린다. 자연의 이치는 자연스러우면서 잔인하다.



어느 날은 햇빛을 따라 걸었다. 떡갈나무 아래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유혹해보기로 했다. 나처럼 외롭지만 다정한 사람과 왠지 잘 어울릴지도 모르는 다감한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쉽쉬쉬이… 입으로 소리를 내자 마자, 고양이가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두리번거렸다. 나를 발견하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다. 고양이가 내게 다가올 만큼 접근해서 풀섶에 앉았다. 손을 땅으로 내리고, 냄새를 맡게 했다. 역시, 우리는 잘 맞았다. 조금씩 다가와서 머리부터 등 꼬리까지 내 다리와 등에 비볐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눈도 감고, 벌러덩 누웠다. 이 녀석, 아주 후리기 쉽구나. 조용히 추커야, 라고 불러보았다. 반응이 없다. 들고양이는 내 집고양이가 될 생각이 없나보다. 흰 양말에 흰 배, 그리고 핑크색 젤리, 또 핑크색 입술을 가진 이 아이는 매력적이었지만 둥근 얼굴이 아니다. 역시 추커(미래의 내 고양이 이름)는 아니다. 여하튼, 그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잠시라도 그의 주인인양 고양이를 길들였다. 안녕, 추커. 다시 만나. 헤어지고 나니 자켓에 털이 한웅큼 묻었고, 손등에 흡혈진드기(Zecke) 새끼가 기어간다. 훅, 불어서 날려 버렸다.

산책 중에 만난 새집이다. 어쩜 이렇게 동그랄까. 지빠귀는 그 얇은 부리로 낙엽을 톡톡 치고, 발로 낙엽을 걷어냈다. 젓가락 한 짝으로 풀을 걷어내는 것처럼 어려울텐데 그걸 해내고 마는구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새들은 부지런하고, 똑똑하다. 새는 부드러운 풀만 모아서, 이런 새집을 만들었는데, 어느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길가까지 들어왔다. 길 앞에 던져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치 앞에 들어온 사물을 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눈앞의 광경에 한눈을 팔게 된다. 눈을 감으면 우리가 보지 못한 다른 것들이 보인다. 과거와 미래의 잔영들이 보인다.

개나리, 함께 피어 있을 때는 색이 곱지만 이렇게 줌해서 보면, 지저분하다. 좀 칠랄레 팔랄레 하는 게 매력이 없다.

쌍겹 벚꽃, 아직 덜 폈다. 만개하기 전에 몇 개라도 담아야 한다. 아니면 금새, 비가 와서 다 떨어진다.

올해 처음으로 보는 꽃, 이름은?

Puschkina

제비턱시도처럼 생긴 튤립

젊은 할미꽃

봄에는 이끼마저도 핀다. 주황색, 옅은 녹색으로. 낮게 수그리고. 검은 버섯처럼 돌에 넓게 깊게 핀다.


Schneeglanz



Christrose
Schlüsselblume
Sternhyazin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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