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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Oct 25. 2024

엄마로 산다는 것

머리카락이 샤워 부스 하수 구멍을 막아 내려가지 않았다. 샤워 거품과 길고 까만 머리가 뭉쳐 내려가는 걸 한참 지켜보다 내버려 뒀다. “머리카락 좀 치우고 나오면 안 될까? 내가 계속 치우게 되잖아.” 남편은 시커먼 머리카락으로 채운 비밀 봉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머리가 자꾸 빠져.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머리숱이 많았고 처음 머리가 빠지기 시작할 때는 무신경했지만, 일 년이 지나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우려됐다.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타박에 돌연 서러워졌다. 그뿐인가. 자주 나는 뾰루지는 긁어서 흉터로 남았고, 출산 후 생긴 발가락 수포는 만성이 됐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발가락 사이에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신경을 타고 올랐다. 긁을 때만 시원했다. 몸에 열이 오른다 싶으면 병독은 발가락과 발바닥으로 퍼져 수포알을 깠다. 급기야 손가락과 손가락 옆까지 번졌다. 무의식 중에 긁은 것들은 부풀러 올랐다 꺼졌다. 정신 차리고 나면 수포는 가라앉았고, 살갗은 활화산 같은 흰 분화구를 드러냈다.


백수로 살았던 상하이 시절 나와 함께 있는 방법을 어렵게 배웠다면, 임신 기간은 무거운 몸으로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웠고, 아이를 키우면서 나보다 다른 존재를 먼저 돌보는 법을 배워야 했다.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엄마 전부를 요구하는 아이라는 존재. 남편이 출근하고 그와의 직면은 거부할 수 없이 다가왔다.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엄마니까.


저절로 시간은 흘렀다. 아이와 가만히 있는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긴 시간 동굴에서 아기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말보다 울음이, 울음보다 표정으로, 표정보다 칭얼거림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몸의 언어는 말로 하는 언어보다 선명했다. 나는 나와 닮은 아이의 본능적인 울음소리를 들었다. 터진 아이의 울음에서 미미한 분노와 지루함이 섞여 있음을 느꼈다. 그걸 견디지 못하는 만큼 내 안의 울음소리도 커졌다. 


“제발, 집에 좀 와줘. 아기가 갑자기 우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먹을 걸 줘도 던지고, 장난감을 줘도 내팽개치고, 엎어주려고 해도 버팅기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얼른 와줘.” 아이는 계속 울었다. 나도 울고 싶었다. 칭얼거리고 싶었다. 누군가 나를 달래 줬으면, 나의 불완전한 표현에 즉각적으로 온전히 반응해줬으면 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이윽고 남편은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편이 나타나자 아이의 기세가 다소 사그라들었다. 남편은 아기를 안고 창밖을 내다보고, 장난을 쥐어 주고 비행기를 태워줬다. 아이는 잠잠해졌다. 그리 어렵지 않은 노력이었으니, 그저 아빠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은 공을 던지고 카펫에 누워서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았다. 급기야 남편이 아이를 목마 태우고 몸을 간질거리자 까르륵하고 부자의 웃음이 끓었다 그렇게 원했던 평화이건만 그들의 평화가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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