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여름 저녁이었다. 상하이 외곽 아파트 9층 베란다, 퇴근하고 귀가하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손을 잡은 나와 남편의 명랑한 미래를 그렸다. 아기를 갖고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빵처럼 탄력 받은 몸으로 왕복 네 시간의 통근을 견디고 열 시까지 야근해도 아이가 뱃속에서 모든 걸 느낀다고 생각하니 고통도 달가웠다.
“중국은 우리 둘 다에게 타국이잖아. 당신 가족은 브라질에 내 가족들은 한국에 있어. 독일이라면 당신에게는 모국이 될 것이요, 위치로는 내 부모님과 브라질에 사는 시부모님에게는 딱 중간지점이야. 당신 부모님은 우리 집에 와서 고국 공기를 마음껏 호흡할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은 독일 국적을 아직도 가지고 있잖아. 아예 외국인 것보다 한쪽의 모국인 곳에서 수월하게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독일이 어때?”
서독 베를린에서 거주하다 10살 때 브라질에 이민 가서 줄곧 자랐던 남편, 유학 간 중국에서 나를 만났다. 20년 동안 브라질에서 성장하고 사회생활을 한 그가 국적만 믿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 알았다. 그에게도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남편은 군소리 않고 내 의견을 따랐다.
아기띠에 2개월 갓난아기를 품고 입국장에 섰다. 남편은 미리 독일에 입국해서 살 곳과 탈것을 마련했다. 부모님이 싸 준 김치 양념과 라면, 여분의 아기 내복과 우주복, 장난감, 책 등 아이 물건으로도 수하물 제한 무게 23kg를 꽉꽉 채웠다. 기내용 토트백에는 금방 꺼내야 하는 아기의 분유와 기저귀, 갈아입힐 옷가지를 넣었다. 백팩에는 무거워서 수하물에 넣지 못한 내 책과 컴퓨터가 들었다. 나의 짐, 독일로 결혼 이민을 가는 삶의 무게는 그만큼 무거웠다.
두 달배기라 하기엔 아기는 꽤 무겁고 길쭉했고 또 예민했다. 기내 배시넷을 설치해 준 승무원의 수고는 고사하고 그것이 무용지물이었던 건 아기가 몇 분 간격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살짝 꿈틀거리고 인상을 쓰며 울기 시작할 때 아이를 들어 올리려 내 손은 벌써 겨드랑이에 있었다. 옆의 승객은 물론 사방의 승객의 수면을 방해할까 봐 신경 쓰며 아기를 안고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
수유 간격을 꼼꼼히 메모해 두었는데, 비행에서는 모든 게 무너졌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면 아기가 울었다. 졸리는 눈을 비비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잘 챙겨 먹지 못해서 젖은 말랐고 불어 터졌다. 출산 후 시작된 엉치뼈 통증은 착석할 때마다 아렸다. 아기가 배부르게 먹었는지 알 수 없어 아이를 달래려 안고 있었다. 승무원의 친절한 미소에 나는 피곤한 몸과 눈으로 계면쩍게 웃었다. 잠시 산모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주는 사람들에게 힘을 얻었고 째려보는 눈초리에 움찔했다.
수하물을 찾고 아이를 앞으로 메고 출국장을 나오자 남편이 꽃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 내내 젖을 물리고 안고 돌아다니다 녹초가 된 나는 그 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촉촉한 그의 입에 마른 내 입술을 댔다. 혼자 아기와 비행하는 고생을 시킨 남편에 대한 원망이 살포시 사위었다. 남편이 한국에서 가져온 짐 세 개를 차에 실었다. 베이비시트에 아기를 눕히고 나는 보조석에 앉으면서 내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린 듯 홀가분했다.
뮌헨에서 우리가 정착할 도시까지 두 시간 걸렸다. 지친 몸의 무게는 눈꺼풀에 짓눌러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시 미워한 남편이지만 타국에서 기댈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고, 그는 그런 짐을 짊어졌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족들을 만나서 즐거운지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서도 타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좀 더 험한 삶일지라도 그는 사랑하고 책임 질 가족들이 있어서 되레 힘을 얻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