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계절은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독일은 겨울 속에 여름이, 여름 속에 겨울이 스며들었다. 4월 완연한 봄은 믿음을 배신했다. 햇빛이 비추다 겨울이 찾아온 듯 돌연 어두컴컴해졌다. 흰 눈이 내려 봄 꽃들이 하루 만에 얼어버렸다. 그해 2월 스노드롭은 눈 속에 피었고, 그해 흰 자두 꽃은 눈에 얼어버렸다.
“당신 오늘 몇 시에 퇴근해?” “다섯 시쯤.”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퇴근 시간을 매일 아침 확인했다. 그 시간을 한계점으로 두고 그때까지 어떻게든 참아 보리라 다짐한다. 남편이 퇴근하면 아이를 릴레이 바통처럼 받고 잘 달려줄 것이다.
“저녁에는 뭐 먹고 싶어?” “그냥 아무거나.” 남편은 접시에 남은 빵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또 아무거나.’ 구나. 식욕은 본성이다. 잘 먹어야 잘 일하고 잘 일하면 잘 잔다. 남편은 그런 본성이 없었다. 배고프면 아무거나 먹었다. 엉성한 식욕으로 생체 리듬을 느리게 이어 나갔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을 생각하고 저녁을 먹으며 아침 끼니를 짜는 나는, 그걸 알면서도 매일 남편에게 먹고 싶은 걸 물었다.
음식을 왕창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매끼가 나를 언젠가 꿀꺽 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따금 두려웠다. 몸은 포만해도 마음은 허기졌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20평 집에 아이와 덩그러니 남겨진다. 아이가 일어나면 모유 수유를 하고, 이유식을 먹이고, 온돌이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바닥, 한쪽 벽으로 붙인 소파와 식탁 테이블이 전부인 거실에서 장난감 몇 개를 늘어놓았다.
아기 이유식을 준비하고 씻기고 재우기 같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일은 빠르게 능숙해졌다. 아이를 재미있게 해주는 일만은 두려웠다. 시킨 일을 열심히 할 줄 알았다. 노는 것이라면 평생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뭔가 즐거운 일을 바라는 아이의 눈이 무서웠다. 아기와 무엇을 할까. 마음이 흰 벽이다. 핸드폰으로 아이 영상을 찍는다. 바스락거리는 애벌레 인형으로 소리를 만들고, 이것 좀 봐. 여기를 만져봐. 아기에게 주의를 끌어본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막막하다. 동요를 재생하고 아기의 반응을 일으키려 억지 동작을 취한다. 아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반응하는 것 같더니 이내 흥미를 잃었다.
'좋은 엄마는 아이와 잘 놀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자문에 저항하고 의무가 어깨를 짓눌렀다. 아이와 놀아주기를 피하려고. 그걸 직면하기 두려워 더욱 열심히 이유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망부석처럼 남편을 기다렸다.
희망으로 기다렸던 아기, 이 존재가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느껴졌다. 도망가고 싶었다. 이 집은 지나치게 한적하고 조용하다. 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아이의 욕구가 보였다. ‘상하이에 있었더라면 왁자지껄한 소음과 인간들이 생산하는 열기, 각종 사건들로 정신이 없었겠지. 이 모든 것들이 정신을 분산하는 흥밋거리인 동시에 우리로 향한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문물과 돈에 도취한 삶, 그리고 가려진 자아.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는 정신적 과로였다. 주위를 둘러싼 소란이 갑자기, 완전히 소멸했다고 생각해 봐. 장막을 걷고 난 후에 비추는 밝은 빛과 고요함은 처음에 무취무색으로 느껴지지 않겠니?’
누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살포시 잠들었다. 정원 들장미 가지 틈에서 박새가 삐조삐조 울었다. 가끔 대문 열리고 닫히며 건물이 흔들렸다. 이어서 이웃이 나무 계단을 오르며 삐걱대는 소리가 들었다. 마지막으로 3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쿵 했다. 드물게 우편물이 왔다.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들을 삶고 샐러드를 만든다. 남편이 오기 10분 전, 핸드폰으로 여러 번 시계를 확인했다. 다섯 시 퇴근을 하고 걸어서 5분이 되지 않는 시간, 회사에서 집까지 발자국을 마음속으로 샌다. 새 메시지는 없다. 독일로 온 후, 가족과 친구들은 아예 해외에서는 핸드폰 메시지가 작동하지 않는 듯이, 연락이 뜸했다. 누군가에게 잊히는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울적하다.
눈앞에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는 매일 커 가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호기심 있는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모유에서 분유, 분유에서 이유식, 과일에서 고기까지 음식의 질감과 맛을 알아간다. 세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아이의 감각으로 조금씩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기어 다니다 소파를 짚고 일어나고 세계를 향해 아장아장 걸었다. 엄마는 곁에서 하나씩 지켜본다. 그 발견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하루와 순간을 공유하려 고국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를 더했고 마음에 닿지 않았다. 공유했지만 공유할 수 없고, 공유되지 않는 하루, 그것이 단순한 오늘을 해결하지 못했다.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도 멀리 있는 나에게는 멀고 멀었다. 속도가 개선됐지만 거리에서 오는 감정의 동떨어짐은 기계문명이 결코, 줄여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엌만큼은 포근했다. 남편이 나를 위해 조립한 부엌은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닿았다. 작아 아담하기도 했고 음식으로 달궈진 방은 늘 후끈했다. 창으로 옆집 이웃 실루엣이 보여 위안이 됐다. 어슷하게 서면 현관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볼 수 있었다. 황량한 거실을 피해 이유식을 만들고, 남편의 점심을 준비하고, 저녁을 요리하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안심했다. 우리 세 가족의 작은 전당 같은 곳이었으니까.
매주 토요일에 봐 둔 먹거리로 끼니를 잇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슈퍼나 시장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보충해서 해 먹었다. 적어도 나는 요리를 좋아했다.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부엌에 기어 들어왔다. 내 다리를 부여잡고 서서 뭔가 말하려고 한다. 서랍에서 냄비를 꺼내고, 깨끗한 국자를 던져준다. 좀 놀다 칭얼거린다. 다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물건, 숟가락, 채반, 냄비 뚜껑을 두 개 주고 쨍 거리는 소리를 만들어준다. 아이가 살짝 웃는다. 그 순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큰 발소리는 남편이다.
“마틴, 들어봐 아빠 오는 소리 아닐까?”아이는 아빠라는 말에 온몸의 세포가 전율한다. 현관문 쪽을 바라보는 아이. 나도 귀 기울인다. “아빠 가봐. 엄마가 창문으로 볼게.” 부엌으로 다가가 남편의 실루엣이 확인한다. “맞아, 맞아. 쉬……. “아이의 눈이 커지면서 다시 현관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있는 힘껏 현관으로 기어간다. 초인종이 울렸다. 마음이 쿵탁쿵탁 뛴다. 부드러운 인터폰의 열기 버튼을 눌렀다. 아빠의 등장에 아이는 몸짓이 큼직큼직해지고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잇몸이 환하게 드러나고, 광대뼈가 오른다. 아이는 폴딱 뛰어오를 것 같이 뛰었다. 아빠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이는 공중 부양 공중에 뜬 게 어색한지. 강아지처럼 다리를 오므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착지를 준비하려는 듯. 갓 물을 빼낸 누들에서 김이 하얗게 올랐다. 아빠 옆에서 아이는 오물거리며 이유식을 맛있게 받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