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초췌하고 찌푸린 얼굴로 아기와 있는 게 아슬아슬해 보였을까. 급기야 남편이 나를 헤바마 앞에 데려다 놓았다. 헤바메는 출산 도우미뿐 아니라 출산 후 산모 회복 상태 체크와 모유 수유 다반에 걸쳐 상담이 가능하다는 걸 헤바메의 굴을 마주하고 알았다. 코가 길고 탄력 있는 머리 컬을 가진 헤마베는 독일어를 잘하는 이탈리아 여성처럼 보였다. 알고 보면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독일인이었지만, 이탈리아인처럼 활달한 기질을 가져서 묻은 말에 과장스러운 제스처에 표정을 찌푸렸다 웃었다 다양하게 바꿨다. 그 앞에서 나는 햇빛을 쬔 것 같은 쾌감이 온몸에 번지는 걸 느꼈다.
모유 수유라는 게 엄마 의지로만 이뤄질 수 없다는 것. 우유가 잘 나오는 체질이 있고 그걸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가족과의 의견 충돌이 없는 이 나라에서 홀로 모유수유를 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포기가 승리라는 걸 진작 알았지만 이 고전(孤戰)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다렸고, 헤바마가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해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나와 헤바마 사이의 접점을 찾고 아내의 고민이 해결되길 바라는 남편의 중간 노력은 눈물겨웠다. 남편은 스스로 지켜본 아내의 아기와의 악전고투 기를 독일어로 설명했다. 영어를 몇 마디밖에 못 하는 헤바메와 단둘이 할 수 없었다. 남편이 중간에서 통역을 해야 했고, 왠지 남편이라도 내 솔직한 고민을 다 드러내는 게 쑥스러웠다. 남편과 아이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엉치뼈가 너무 아파요. 무통 분반을 했어요. 제가 척추 측만증이 있는데 어쩌면 그 때문에 약물이 왼쪽으로 치우쳐 들어갔고 출산이 끝나고 과연 왼쪽 다리에 아무런 감각이 없더니 하루 종일 못 걸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엉치뼈가 너무 아파요. 앉지도 못하겠어요. 침대는 좀 낫지만 밤에 깨어나서 아이 젖을 물리는 게 힘들어요. 가족도 친구도 없이 밤새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게 어떤 일인지.” 신부 앞에서 모든 걸 털어놓듯이 애절하게 호소하듯 살려 달라고, 도와주세요, 하고 구조 요청했다. “알아요. 남편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에요. 될 수 있으면 엄마가 자게 설거지나 청소는 대신해 주셔야 하고요. 회복하기 위해서 엄마와 아기 요가를 해보는 걸 어떨까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얼떨결에 요가 수업을 신청했다. 건강 보험에서 수업료의 반절을 대준다고 했다. 수업료가 걱정이 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은 이로써 독일에 대한 호감도가 올랐다. 남편이 신청하고 몸만 가면 되는 수업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아기 돌보기에 지친 나와는 달리 독일 엄마들은 활기찼다. 모두들 아기를 앉힌 차 베이비시트에 커다란 기저귀 가방을 들었지만 가뿐하게 계단을 오르고 내렸다. 서로 눈 인사하고 아기가 필요한 것을 주고 차분히 요가 수업에 열중했다. 어떤 아기는 내 아기처럼 칭얼거렸지만, 엄마는 베이비 시트를 살짝 흔들고 젖꼭지를 물렸다. 대부분 그걸 물고 자거나 혼자 잘 놀았다.
내 아이는 요가 동작을 취하면 울었다. 경기 일으키듯 얼른 요람에서 아기를 꺼내 안았다. 아이가 가슴에 닿기 전, 주위를 살피고, 그러기 전에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경적을 깨고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시선은 아기에게서 엄마에게로 넘어왔다. 애처롭게 보든 신경질적으로 보든 엄마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다. 아이의 울음을 막는 일이 우선이고 인공 젖꼭지가 없는 나는 아이를 안고 복도로 나왔다. 헤바메의 괜찮다는 눈웃음에도 더 이상 그다음 문을 열 수 없었다. 더 이상 거기에 가고 싶지 않았다. 눈치 보고, 다른 엄마들의 요가를 방해하는 것보다 혼자 집에서 아기를 달래고 젖을 먹이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다.
버슨 분홍 벚꽃이 피었고 못 먹는 버찌가 열렸고 갈잎이 된바람에 날렸다. 다시 온 겨울에도 나는 흐린 회색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았다. 마음의 어둠은 짙어졌고 아팠다.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고 슈퍼에서 장 보는 솜씨가 늘었어도, 조용한 오전 길에서 찬 공기를 맡으며 숨통이 트인 것 같았어도 마음은 공벌레처럼 오그라졌다.
남편의 권유로 다시 찾은 수업 센터, 이번은 좀 달라야 했다. 어쩌면 상황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 고립에서 꺼내 줄 사람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가족의 집(패밀리 하우스)’이라는 곳은 출산 도우미 헤바메와 어린이 요리 수업, 출산 준비 코스 등의 수업을 해 주는 한국의 문화 센터 같은 곳이다. 헤바메의 추천으로 아기와 함께 수업에 참가했다. 아기들이 발가벗고 다양한 촉감의 천으로 촉각 훈련을 하기도 하고, 공이나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았다. 그동안 엄마들에게는 교류의 장이 되었다.
유모차를 패밀리 하우스 앞에 세워 두고 배시넷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대형 유모차에서 배시내만 꺼내서 쇼핑 카트나 차에 분리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아이를 중간에 넣어도 너무 길었고 아이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힘이 너무 많이 들었다. 한쪽 손으로 들어야 했다. 계단을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갈색 새시에 젖빛 유리문을 당겨 들어서면 바로 앞에 또 참나무 문이 보인다. 꾹 닫혀 있는 문, 수업 시작 전, 수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시간에 맞춰 왔다. 안쪽에서도 밖에서도 기척 없다. 어디선가 아래층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볶은 양파향이 나고, 위층에서는 커피 향이 공기를 갈랐다. 신발장과 옷걸이가 있는 곳에는 재킷이 하나 걸려있지만, 아무래도 그곳이 수업하는 곳이 아닐지도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 갈까. 현관에서 낮은 발기척이라도 나면 뒤를 돌아봤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시 교실 안의 소리를 엿들었다.
똑 똑-. 하고 문을 열자 담당 강사는 수업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안경 렌즈 아래 파란 눈이 밝아지며 웃었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중년 아주머니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할로,라고 했다. 겨울에도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 거기에 들어서서 누군가 나를 접대해 주길 기다리는 순간 어색하고 곤혹스럽다. 선생님의 얼굴을 보기 전부터 떨었고,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지 내가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웃는 얼굴로 “거기 앉아서 준비해요.” 하고 말했다. 한 명씩 들어오는 엄마들은 전부 독일인처럼 보였다. 수더분하게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머플러를 한 모습이 매한가지 비슷한 인상이었다.
매트 위에 엄마들은 둥그렇게 앉았다. 오랜만에 긴장했다. 독일어 수업을 몇 번 들었고, 이제 초급 반이었다. 부족한 독일어를 가감 없이 실험하고 얼굴을 붉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게 언젠가 올 테지만 지금이 아니다. 독일어보다 영어가 편했다.
“저는 한국에서 왔고요. 독일어는 아직 잘 못해요.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니, 친구를 만들러 거기에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뱉고 내장까지 떨렸다. 독일어를 하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나. 다른 엄마들의 표정이 조금씩 스쳤다. 그걸 제대로 알아들어서 그것에 대해 코멘트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친구를 만든다는 말, 사람이 그립다는 말, 그리고 또 내가 외롭다는 말, 당신들 중에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 부담으로 느낀 걸까. 너무 조급하고 적극적이었던 걸까. 좌중을 둘러보며 나는 그 말을 뱉은 걸 후회했다. 엄숙한 교회 집회,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아주 신성한 자리에서 마치 종교 비하 발언을 한 듯,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다른 사람들은 침착하고 조용하게 자기를 소개하고 아이가 몇이 있으며 만나서 반갑다는 으레 해야 할 말들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돌아가면서 소개가 끝나자 옆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예요. 지금은 육아 휴직을 보내는 중이고, 이 아이가 첫째 아이랍니다.” 자기를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옆에 앉았고 영어로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나는 그녀의 독일어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들으면서 눈썹이 치켜세우고 눈살을 찡그렸다. 키는 나보다 5센티 더 큰데, 바지 사이즈는 두 배 큰걸 입을 정도로 큰 사람이었다. 수더분했다. 아기도 엄마를 닮았다. 통통하고 굵은 다리를 꿈쩍거리는 걸 그녀는 아주 귀여워하며 ‘귀여운 생쥐’라고 불렀다.
그녀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잘 웃었다. 내게 먼저 영어로 말을 붙이려고 했는데, 거의 무반응에 가까운 나를 보고 무안해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한발 물러섰다. 그녀의 다정함을 환영하면서도 ‘그냥 나를 내버려 두세요. 그냥 이런 우울한 기분, 비참한 자신과 혼자 있게 두세요.’라는 아우라(Aura)를 보내고 있었나 보다.
조용히 아이들의 옷을 벗기고, 공갈 젖꼭지를 물리는 엄마들의 모습을 눈여겨봤다. 다른 엄마들이 아이를 입힌 것이나 양말이나, 또는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 유모차, 내 것과 약간은 달라 보이는 것. 아이들은 내복 대신 바디 슈트를 입어서 배를 따뜻하게 하고 스타킹을 입혔다. 내가 아기 옷을 벗기자 아기가 칭얼거렸다. 강사가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다 그래요. 제가 알려 줄게요. 아기가 이렇게 나체가 되었을 때 자유로움을 느껴요. 몸으로 사물을 대하면서 익숙해지고 그게 옷으로 둘둘 말고 있을 때보다 편하고 자유롭다는 걸 알게 돼요. 엄마와의 접촉으로 아기의 기분도 좋아지고 안정감을 느껴요. 그리고 아기를 이렇게 다리에 올리고, 아직은 어리지만 기어오를 수 있는 다리 훈련을 시켜주는 거예요. 네 그렇게요. 잘하시네요.” 안경 너무 파란 눈은 침착하고 상냥했다.
수업이 끝나고 강사는 다른 엄마와 대화 중이었다. 내가 인사하고 내게 유일하게 인사하고 다정하게 대해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해야 한다.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다 불특정 하게 좌중을 향해 크게 츄스(안녕히계세요.)하고 나가는 독일 엄마가 열어 놓은 문을 따라 나갔다. 문을 조용히 닫고 자취 감추듯 나갔다. 그럴 때면 세상은 더 낯설었다. 배시넷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당당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음식을 했다. 굶주린 마음을 채워야 했다.
이곳에 쌈장이나 된장을 팔지 않았다. 좋아하는 해산물이 신선하지도 싸지도 않았다. 고사리, 취나물 따위의 무침 나물 종류가 적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그전에 먹던 음식들을 요리했다. 시들어가는 식재료를 우선적으로, 고국에는 없는 콩나물을 대체할 숙주나물을 사고, 바람이 든 무 대신 콜라비로 뭉근하게 끓여 단 맛을 우려낸다. 다시마와 멸치로 풍미를 더한다. 그러나, 고국의 맛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었다. 진한 맛에 대한 허기를 영원히 맛볼 것 같았다. 여기 사는 한 채워지지 않은 허무한 하루가 매일 찾아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