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가게에 들어갈 때면 가게 주인의 과도한 친절, 요구를 묻는 일, 물건을 고르라는 겸연쩍었다. 투명 인간이 되어 원하는 걸 실컷 구경하고 원하는 걸 사고 돈만 내고 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구경이면 됐다.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고, 살지 안 살지 망설이면 결정이 늦었다.
물어도 답을 이해 못 했고, 당황한 스스로가 수치스러웠고, 외국인을 상대하는 귀찮은 점원의 표정을 피하려고 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며 일상적인 일에서 매번 자신의 무능함과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 듣지 않으면 말할 수도 없다. 나는 그런 문구를 알고 있었을까. 알았으되 감히 실천하리라 마음먹지 못했다. 묻지 않고 발품을 팔아서 해결하는 편을 택했다. 최후와 최악은 내 존재가 누군가를 귀찮게 하는 일이다.
소파와 티브이, 식탁 테이블만이 덩그러니 있는 큰 거실에서 아이의 장난감 떨어지는 소리가 천장과 벽을 치고 울렸다. 말 못 하는 아이와 나와 단 둘이. 수다쟁이 엄마라도 아기와의 일방적인 대화를 매일 여덟 시간을, 평일 5일을 견딘다는 건 곤욕스럽다. 아이 간식과 입을 옷은 충분했지만 어쨌거나 외출을 결단했다. 겨울이라 바디 슈트와 스타킹 양말에 재킷에 푸스 작(유모차 침낭)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대형 유모차의 앞을 들어 올려 무게를 뒷바퀴에 실어 하나씩 계단을 내려간다. 아이는 그런 흔들림을 좋아했다. 지루한 거실 풍경보다 색다른 광경과 신선한 공기가 이 흔들림 뒤에 있다는 걸 아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작은 도시에서 돌 배기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옷가게는 단 하나. 그곳 분위기가 자유로워 즐겨 찾았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넓어서 유모차 출입이 편리했다. 점원들은 접대보다 물건을 진열하는 일을 한다. 손님이 편안하게 쇼핑할 수 있다. 점원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입어 볼 수 있다. 많은 구경객이나 행인들을 길에서 마주친 것처럼 계산할 때 필요한 말을 한다. 나는 아무 방해 없이 구경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점원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유모차를 끌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노란 얼굴에 많은 점들 마른 입술, 까만 머리에 흰머리가 눈에 띈다. 앞머리는 듬성드뭇했고 기름졌다. 접은 청바지 단 한쪽이 더 길어 보였다. 티셔츠에서 우유 냄새가 났다. 작은 고춧가루 하나가 밝은 형광등 아래 눈에 띄어 조심스럽게 뗐다. 화장을 하고 좀 잘 차려입을 걸 하고 후회했다. 외출은 감행했어도 화장할 기운은 부재했어도 밝은 빛 아래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치자 부끄러웠다.
스웨터가 여러 개 있지만 꽈배기 스웨터가 갖고 싶다. 탈의실에서 입어 본다. 얼굴색에 어울리지 않아도 세일하니깐, 그 색을 언제부터 갖고 싶었으니깐. 남편 양말 뭉치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봉투 필요하세요? 30유로. 감사합니다. 독일어를 잘해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더 잘했다면 혹시 회원 카드를 만들 거냐고 묻겠지. 그렇다면 가입서를 읽고 정보를 기입하는데 모르는 단어가 있을까 봐 뒤에 온 사람들이 내가 서 있는 계산대에서 초조함을 느낄까 봐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 있게 웃고 그들의 눈을 마주쳤을 것이다.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지갑에 시선을 고정했다.
카드로 할게요. 계산을 하고, 봉투를 손목에 걸고 출구로 유모차를 틀었다. 오른쪽 벽에 다른 옷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 봄이 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입고 싶었던, 검지와 엄지로 옷감을 살짝 만져 본다. 부드럽고 마음에 드는 패턴, 한번 입어 볼까. 부스럭거리는 봉투를 들고 탈의실로 몸을 돌렸다.
아기가 서서히 손가락을 펴고 웅크린 다리를 버둥거렸다. 눈을 뜨고 유모차 차양에 갇힌 자신을 발견한다. 에에…. 하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움찔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점원은 멀리 있다. 금방 들어온 여성 고객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짜증 섞인 울음은 커졌다. 배가 고픈 것일까. 밀폐된 공기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판단을 내리 전, 피를 피하는 여인처럼 쇼핑 몰을 나왔다. 아이는 과자를 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움직이는 차를 보고 기분이 나아졌는지 울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서 계속 걷는다. 멈추지 않고 돌진한다. 사람 없는 놀이터로.
여느 때처럼 거리에는 행인이 귀하다. 지나가면서 할머니나 아줌마들은 내 얼굴을 은근슬쩍 훔쳐보는 듯하고, 아이 얼굴을 유심히 봤다. 미소 짓고 갔거나, 한번 눈길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도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유모차를 끌고 인적이 드문 한적한 놀이터에 갔다. 아이에게 그네를 태웠다.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가 깔깔거렸다. 햇살이 아이의 환한 얼굴에 비췄다. 간직하려고 영상을 찍었다. 어쩌면 엄마에게 보여줄 수도 있었다. 오래간만에 아이와의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데 인기척이 났다. 서둘러 옷매무새를 다졌다. 아이를 바라보고 그네를 한번 더 세게 밀어주고, 따라 웃는다. 완전히 몰입해 있다는 듯이. 잠시 손녀를 데리고 놀러 온 할머니에게 인사할까 고민했지만, 그만뒀다.
나 대로 살고 싶었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이렇고 저렇게 해야 한다는 남의 간섭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많은 속삭임들이 고국에서는 존재했다. 고국의 뉴스를 듣지 않고 친구들의 소식과 통신을 차단하고 철저히 혼자되는 타국에서 정말 나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똑같이 누군가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독일어로 말할지, 그 말이 틀릴지, 결국엔 바꿀 수 없는 나 자신, 동양인으로 보이는지에 대한 이상한 것에 신경 썼다. 이것이 내가 바란 자유인가. 자유란 것은 어쩌면 내가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기로 결정하는 방식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날 저녁, 아이를 재워 두고 옷을 입어 봤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예뻐 보이던 민트 색이 어두운 집 조명 아래서는 저렴해 보였다. 아이 분유를 먹이면서 다음날 바꾸러 갈까 고민한다. 영수증을 쇼핑백에 잘 넣어뒀다. 마음에 안 드는 옷 대신, 돈을 거머쥐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
아침에 환불하러 간다니, "당신은 환불하기 위해서 사는 거야?"라고 남편이 짓궂게 놀렸다. 독일어 수업을 가기 전에도 할 줄 아는 말이 “환불”이었으니 그의 말을 반박하기에도 그런 나를 다른 방식으로 변호하기 뒤늦은 것 같았다. 내 삶을 환불하려는, 그 상황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듯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리려는 듯 교환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역시 안 사길 잘했어. 안심하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