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에 대한 이런 갈증은 처음이었다. 아기와 하는 한국어가 전부였다. 에코처럼 돌아오는 아기와의 한국어 대화를 길게 감당할 수 없었다. 외국에 있어도 한국인 띠를 이루던 유학 시절과는 달리 주변에 한국인은 귀했고 있더라도 아기와 시름하는 하루는 더디게 지났다. 누군가와 교류할 여력이 전무했다.
우연히 다른 도시 큰 장난감 상점에 구경 갔다. 그는 얼추 봐도 한국인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기 전에 한국어와 한국인에 대한 갈급이 나를 그 남자 앞에 서게 했다. “한국어 정말 오랜만에 해요. 괜찮으시다며 아내 분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오금이 저릴 만큼 춥고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가 내 목소리의 진동과 초점 흐린 눈을 감지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첫 만남에 이런 창피한 모습을 보여주다니,라고 되뇌며 자신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청바지에 머리를 질끈 묶은 수수한 한국인 여성. 이런 초라한 내가 어떻게 친구를 사귀겠다고 손을 내밀고 있는 걸까. 힘차게 달려갔던 길을 도로 축 늘어져 돌아갔다.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었더라면, 떨지 않았더라면 연락을 해 봤을 텐데……. 소심해졌다. 그 끝은 미노스의 미궁. 절망은 자잘한 조각들이다. 매끈한 발에 촘촘히 좁쌀처럼 조각이 박혀 급기야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날은 급기야 오고야 만다.
상하이에서 살던 때다. 남편이 독일 도시 팸플릿을 내게 건넸다. 아름다운 햇살과 햇살이 비친 투명한 초록 물빛, 빛바랜 나무 색 데크 위로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진 공원 사진이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 이런 곳에 살면 좋겠다. 평화롭고 고요하고 포근하겠다. 선택할 수 있는 독일 두 도시 중 나는 두 말없이 지금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결정했다.
모국에서는 언어를 기초로 더 안정적이고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나. 그럼에도 나는 그 익숙한 언어와 문화, 환경을 버렸다. 외국인 남편을 사랑하고 결혼한 것과 같은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 선택에는 다른 세계에의 갈망과 실험해 보겠다는 도전의 의미를 포함했다. 판도라의 항아리가 희망 같은 기대를 제외하곤 세상의 모든 불행과 질병, 고통이 가득 찼던 것처럼 자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감당해야 할 고통은 고국의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주해야 했던 타발적 이민과 다를 바 없다. 결정의 뒤에 숨어있던 다른 요소들이 매끼처럼 꼬박꼬박 찾아왔다.
한 번, 독일어 급수증을 잃어버렸다. 독일어 수업료 환급에 꼭 필요한 서류여서 마지막 희망을 잡고 다녔던 어학원에 재발급 문의를 하러 갔다. 어학원 원장과 마주쳤다. 원장은 ‘네가 무슨 볼 일로 여기 다시 왔니?’라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아니, 안 돼. 이런 걸 나한테 달라고 하면 내가 오는 사람들 다 받아줘야겠네?” 원장의 말은 원칙적으로 옳았다. 그래서 공손하게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굴욕적으로 구부려 있는데 어깨를 누르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빌라는 식이었다. 행정상의 문제를 이유로 들어, 어려움을 이유로 간접적으로 거절했다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단단한 철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원장은 평소 남자 외국인들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대했지만, 나 같은 외국인 여성한테는 인사를 먼저 하지도 인사를 받고도 무시했다. 학원 등록에 대한 문의에는 금을 본 듯 눈을 반짝였고, 학원을 떠나고 부탁하러 오는 외국은 찬밥으로 대했다. 원장은 세르비아에서 온 외국인 여성이다. 2017년 독일 전역과 이 도시에 유입한 난민과 외국인 덕분에 어학원은 성황을 이뤘다. 조금 힘이 있다고, 자신이 처음 독일에 와서 당했던 부당한 행위를, 힘없고 약했던 과거 자신과 같은 처지인 외국인 여성,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원장의 거만한 얼굴과 어조는 옆에서 지켜보던 독일인 비서까지 나를 동정하게 했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 복받쳐 눈가가 촉촉해졌다. 꾹 참았다. 다행히 원장이 나가자 비서가 서류 재발급을 도와줬다.
권력을 소유한 자는 자신이 약자였던 때를 예사롭게 잊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다수로서 약자를 불공평하게 대할 수 없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그럴 권리를 가진 듯이 자행한다. 약자보다 강자가 더 예민해져야 함은 그 까닭에서다. 그 권력에 무참히 약자들이 희생될 수 있으므로.
다수는 자기가 익숙하고 당연한 문화 언어로 소수를 쉽게 희롱할 수 있다. 한 번은 직업 코칭을 받으러 갔다. 한참 진행 중에 흑인 남성이 들어와 몇 가지 문의했다.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존경어가 일반적이다. 예외는 거의 없다. 코치는 그 남성에서 당장 반말했다. 그가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가정에서 반말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하대한 것. 지금까지 코치로서 예의 바르고 이성적이던 모습과 다른 의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들에게 다수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수는 ‘야만인’이다. 말을 못 한다고 해서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다. 무감각할 것이라고 넘겨 집는 것이다. 다수는 소수에게 비우호적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막 대한다. 그들은 동등한 다수에게는 상상도 못 하는 예의를 파괴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편하게 편견의 프레임을 뒤집어 씌운다. 폭력이다. 사회의 마이너러티가 되어보면 다수가 행하는 폭력의 가혹함은 견디기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차별의 변화는 거기서 시작된다.
이 나라에서 오래 산다고 해서 과연 이 나라 사람이 될 것인가.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그들을 이해하고, 또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적 인간이 되기를 애초에 나는 기대했던가. 팸플릿 속의 고요한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만 순진하게 품었던 건 아닐까. 포토샵으로 잘 마무리된 사진 뒤 자잘하게 생활이 흘러간다. 그 안에 틈틈이 박힌 애환을 간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직관을 믿고 직진했다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자 스스로 조소했다. 낯선 언어, 낯선 피부, 낯선 문화, 낯선 시선이 서서히 내 몸과 마음을 조금씩 좀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