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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Oct 25. 2024

눈빛이 전하는 말

매일 유치원까지 걸으면서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다짐한다. 오늘은 말 한마디라도 해야지. 누구를 만나면 먼저 인사해야지. 평소 밝은 표정으로 살갑게 말을 거는 선생님이 보이면 인사한다. 굳은 얼굴의 선생님을 만나면 할로, 마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이가 유치원 생활을 한지 오랫동안 아이가 누구랑 잘 지내는지 무슨 놀이를 좋아하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묻지 않으니 누구 하나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물어보면서 선생님의 안부를 물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디까지 사생활이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지 알 길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거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다. 눈이 마주치면 어색해서 눈을 피하게 했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상한 꼴이라니, 때로는 그걸 회복해보고 싶었다. 오늘은 물어야지. 각오를 단단히 한다. 

평소처럼 네 시가 조금 못되어 아이를 데리러 갔다. 선생님들은 학부모와 이야기 중이다.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도 보는 척 마는 척했다. 같은 시간 아이를 데려오므로, 저 문을 들락거리면서 마주쳤던 학부모도 그랬다. 자주 그런 상황에 부닥쳐서 마비된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진작에 관계에서 자유롭고 싶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게 슬프다. 

유치원에 들어서자 주방에서 맛있는 구운 고기 소스 냄새가 났다. 게시판의 공지를 읽고 있었다. 유치원 중요한 행사를 놓치거나 유치원 선생님들 교육기간은 아이를 맡길 수 없었고 어떤 날은 하원 시간이 짧아졌으니 꼼꼼히 읽어야 했다.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 인기척에 눈을 돌렸을 때 주방 할머니를 발견했다. 앞치마에 손을 닦다가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아이가 참 예뻐요.” 

언제부터 그 주방에서 일하신 걸까. 내 아이를 아는 걸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는 딱 보기에 자상하고 친절했다. 적당히 저기 머물면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같았다. 다정한 눈으로 관찰한 진심을 담은 칭찬이었다. 예의상의 경박한 칭찬과 달랐다.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몇 년 동안 그 말을 고대했는지 모른다.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의 서러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녹지는 않으리. 마음의 상처는 조심스럽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러나 촘촘한 상처에 햇살이 스며들듯 여러 가지 모양들의 진심 어린 관심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거다. 

“어때요? 독일 생활은 좀 적응이 되나요?” “그저 그래요. 아이도 그렇지만, 저마저도 친구 사귀기가 만만치 않고요.” “슈바벤 사람들을 코코넛에 비유해요. 먹기 힘든 과일이라는 거죠. 그런데 과즙은 달고 과육은 부드럽죠.” 할머니는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흰머리가 빛났다. 주름진 눈길은 봄햇살처럼 부드러웠다. 

코코넛이 땅에 떨어졌다. 무른 과일은 떨어지면 짓눌러지지만, 코코넛은 단단하다. 사브르로 찍듯이 단단한 껍질을 쪼아 깬다. 약해진 곳에 작은 구멍을 내서 고인 물을 마신다. 미네랄의 성분이 있어 금세 갈증을 해소하고 달짝지근하다. 껍질 안에 숨은 향긋한 너트를 꺼내려면 반을 쪼갠다. 누렁지처럼 긁어서 설탕을 넣고 디저트로 먹는다. 애호가에게는 이런 일련의 노동이 달갑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골칫거리. 다른 과일이 없고 코코넛밖에 먹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면? 하릴없이, 그걸 깨어 먹어야 할 수밖에. 

아이가 노는 2층으로 갔다. “마테오, 엄마가 왔어요.” 선생님이 아이를 부르고, 놀던 장난감을 스스로 정리시켰다.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어린이집 아이들의 이름을 익히고 있었다. 선생님 한 명이 갑자기 다가왔다. 경기를 일으키듯 놀랐고 선생님은 아유, 괜찮으세요. 물었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물어보려던 그 말. “아이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루를 지냈나요.”라는 말은 애석하게도 입천장에 딱 붙어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놀랐는데 내일 물어보자. 아쉬움에 지나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한참 보았다.

그다음 날까지 그다음 주까지 숙제를 안 한 찜찜한 느낌이 계속됐다. 오늘은 해야지. 하면서도 한편으로 용기가 차오르는 날, 활기찬 태양을 기다렸다. 아이들이 떠들고 노는 목소리가 정원에서 흘러넘치고 선생님들도 그런 밝은 에너지 발산에 힘입어 어떤 학부모님이 말을 걸어도 기분이 좋은 그런 상태를 기다리거나 혹은 내 하루가 뿌듯해서 좋은 일이 있어서, 자신감이 솟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그런 일은 드물었다. 날은 자주 어두웠고 기분은 빈번히 가라앉았다.  

입을 열었을 때, 머릿속에서 수 없이 시뮬레이션했어도 딱 한마디를 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선생님 앞에 선 착한 어린아이는 벙어리가 된다. 말문이 막혀 멀뚱멀뚱, 그 와중에 선생님이 학부모와 이야기하는 중이라면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는지 있는지 생각했다. 저 정도도 못 알아듣는데 어떡하지. 가능하면 초라해지는 모든 순간들을 피하고 싶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조용히, 무리를 일으키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서 ‘아들아 집에 갈 시간이야.’ 하고 아이의 재킷을 입혀주고 아이가 신게 좋게 부츠 찍찍이를 미리 떼 놓았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때 나를 관찰하는 선생님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에게 부츠를 신기면서 얼굴에 피가 몰린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그 시간이 싫어서 그런지 열이 올랐다. 선생님은 내 옷차림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고 내일 봐요,라는 어제와 같은 말을 남기고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급히 그곳을 나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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