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수업을 다시 가면서 나는 되살아났다. 매일 선생님, 반 친구, 거리에서 스치는 행인들이 고립된 나에게 눈인사했다. 몇 마디 독일어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엉성한 문법으로 출신지를 답하는 일상이 중국 유학 생활로 되돌려 놓은 것처럼 유쾌했다. 말이 안 통해 답답해도, 진귀한 풍경과 먹거리와 구경 거리에 정신이 쏠리고 매일을 흥분의 미열로 지내던 그 시기. 남편을 만나고 사랑하던 그 시간들 속으로 되돌아갔다.
각기 어떤 목적, 직업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생활 독일어, 혹은 심심해서, 다른 이유로 거기에 모였다. 우리는 아기처럼 옹알거렸다. 알고 있는 쉬운 단어 몇 개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자기를 표현하려는 돌 배기처럼. 아기는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면 되었고 엄마와의 한정된 조건 아래 아기는 몸과 표정, 신뢰나 애정 같은 정서적인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교실에 모인 외국인은 타국이라는 같은 조건에서 똑같이 낯선 공기로 호흡했다. 독일어라는 공기는 너무 희박해서 적응하기 힘들다는 걸 우리는 잘 알았다. 언어에 제스처와 표정을 추가했다. 언어 너머 마음이 통했다. 작고 안전한 테두리에서 우리는 많이 웃었고 즐거웠다.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단어들, 단순히 외워야 하는 문법들 가운데서 매번 나오고 일상에서 스친 말들이 불거진다. 궁금증이 증폭되고 꼭 그 순간에 해결되어야 한다. 그 질문에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는 유사한 질문을 수백 번 들었다. 어떻게 설명할지 잘 알지만, 반복된 물음에 대한 짜증이 이미 났다. 또 이 문제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미간에 가는 선을 그었다.
그의 표정을 읽고 싶지 않다. 나 스스로가 그런 일에는 같은 얼굴을 하므로 불가피하게 읽는다. 내 얼굴에 놀라는 것처럼 제법 상처를 받는다. 너무 오랫동안 참았던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했던 물음이 어쩌다 엄마가 바쁜 와중에 신경을 건들어 오히려 화만 불러 일으킨 것이다. 선생님은 시선을 피하고 설명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친구의 어그러진 문법과 부족한 어휘의 해석이 더 귀에 쏙쏙 박혔다.
언어는 힘이다. 문법과 정확한 의미를 지향하는 어학 선생님과 네이티브는 우리보다 더 강하다. 더 크고 무서운 무기를 가졌다. 이제 우리는 겨우 나무 꼬챙이 하나를 들었을 뿐, 그들은 아주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그걸 베어버린 듯이 우리를 을렀다. 독일어 수업에서 우리는 방패를 만든다. 아주 단단하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를 수천 번 두드린다. 두드리고 두드려서, 언어라는 칼로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방어다.
남편이 중대한 문제를 해결했고 그의 넓은 보호막 아래 조그맣게 웅크리면 됐지만, 무한 도피는 불가했다.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맡은 바를 해야 했다. 한편, 고국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에 마음이 비장해졌다. 심지어 슈퍼에서도. 물건을 고르고 쇼핑 카트에 넣고 계산하러 간다. 앞 사람이 계산을 하다 뭔가 잘못되거나 삐삐 경보 알람이 울리면 혹은 내 뒤에 줄이 길어질 때면 몸이 뻣뻣해졌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장을 많이 봐서 줄이 길어진 것은 아닐까. 지갑을 미리 꺼내지 않아서 지체되는 것은 아닐까.
점원이 내게 물었다. 대충 네, 로 대답해도 될 것 같아서 네, 한다. 못 알아들어도 알아들은 척, 한다. 못 알아들어서 바보가 되는 것보다 알아듣는 척해서 바보로 취급당하지 않는 게 우선이다. 솔직하게 바보가 되는 것은 고수가 하는 것. 나는 못 알아들었을 때 쪼그라드는 자신을 위장하는 하수였다.
어떤 일이 생겨서 말을 해야 한다면, 아이가 있는데 그럼 어떡하나. 남편에게 그런 하찮은 일로 부탁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어쨌든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바랐다. 얼굴 붉히는 일이 일어나질 않기를 바랐다. 걱정은 만약을 대비한 가정에서 나온다. 만약을 감당하기에 나는 무능했다. 산 물품이 계산서의 목록과 일치하는지 가격이 맞는지는 그냥 넘겼다. 불일치하더라도 그걸 묻고 확인할 힘은커녕 용기조차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