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원에서 독일어 걸음마를 배웠다면, 남편의 동료를 만나거나, 어린이집의 학부모들과 대화할 경우는 실전이다. 그들의 말은 빨랐고, 어떤 주제가 나올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대화의 흐름을 쫓기는 해도 정신이 일시적으로 달아났다. 그들과 다른 먼 풍경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점점 떨어졌다.
한 번은 남편이 친해진 직장 동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내와 매주 복싱 에어로빅을 갔다. 나도 운동을 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그들을 따라가면 되겠다고, 아이를 돌봐야 하나 번갈아 운동을 하기로 했다. 남편은 어떤 운동이라도 벗이 좋으면 어디든지 따랐고, 나는 새로운 운동이 궁금했고 출산 전의 굳센 체력을 되찾고 싶었다. 남편 직장 동료와 아내는 격일로 우리를 픽업했다.
복싱은 재밌고 힘찼다. 한번 하고 나면 의욕이 솟았다. 운동을 할 때만큼 내 처지를 잊었고 쾌활한 본모습이 되었다. 코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하더라도 거울이 있었고 앞에 있는 사람이나 코치의 동작만 따라 하면 됐다. 한번 두 번 하고 나면 그다음은 단순 반복이었으므로 순조로웠다.
남편의 남자 동료는 항상 기분이 좋았고 농담을 잘했다. 단지, 남자의 가는 목소리는 차에서 희미하게 퍼졌다. 흘리는 발음은 뒷좌석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못 알아들어서 ”Wie bitte?(뭐라고요)?”를 세 번 하고도 오리무중일 때가 많았다. 여러 번 못 알아들으니 대부분 흘러들었다. 때로는 알아들은 척, 네네를 두 번하고 그다음에 꼭 대답해야 하는 물음이 나오면 대충 대답했던 게 탄로 났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운동하고 들떠 질문하면 빠르고 긴 독일어 답이 꼬리를 늘어뜨리다 차창유리에 부딪쳤다.
어쩌다 동료의 아내와 단둘이 가는 날, 차에 오묘한 공기가 감돈다. 나는 운전하는 여자의 숨결을 하나하나 느꼈다. 여자의 독일어 발음은 좋았고 듣기도 좋았다. 문제는 내 독일어 실력이었다. 독일어학원에서 배우는 띄엄띄엄한 독일어, 빠르다고 해도 완벽한 표준어 발음과 밖에서 각양 각색한 악센트와 발음, 목소리의 높낮이, 또 지역 사투리, 차 안, 운동하다가 몇 마디 건네는 말은 만질 수 없는 귀신의 언어이다. 침묵을 깨기 위해 몇 마디를 더하면, 쏟아지는 독일어 폭풍우에 정신이 혼미했다. 적어도 그녀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독일어 선생님처럼 “아직도 못 알아듣겠어?”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함께 복싱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인사를 잘하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구분되었다. 인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의를 품었을까. 내가 그런 것처럼 누군가의 적극적인 인사를 기다릴 수도 있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을 수도 있었다. 간혹 인사는 고사하고 얼굴을 빤히 보고 발 끝부터 머리 정수리까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사람인지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얼굴, 내 옷이 잘못되었을까. 내가 그들을 감동시키면 좋겠지만 그런 시선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일부러 창밖을 내다보든지 핸드폰 잠금 패턴을 풀었다. 정겨운 사람들은 달랐다. 날씨 이야기나 참가 인원이나 간단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 좋았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지었다.
대개는 누군가가 내게 와 주길 바랐다. 다가온 사람들에게는 모순적이게도 멀리 떨어지라고 했다. 언어 탓이다. 못 알아들을까 봐 실제로 못 알아들었고 위축했다. 이따금 다가온 사람들에게도 퉁명했다. ‘못 알아들어요. 그만하세요.’ 어쩌면 그건 다름 나를 향한 불만이었다. 그런 나를 왜 챙겨? 아니잖아. 너네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깨지기 싫어 방어하고 약한 걸 들키기 싫어 자신을 보호했다. 사람들의 호의는 묶이고 서서히 멀어졌다.
뼛속부터 소극적인 자신을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못 알아들어서 당황하는, 틀린 문법으로 사람들을 움찔하게 했을 때는 스스로 실망한다.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나는 왜 이럴까.‘하고 실망했다. 다른 말을 하기보다는 확실한 아는 몇 마디의 말과 긍정의 웃음을 유지했다. 그리고 조심해서 관찰했다. 나는 이제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내가 바로, 그 딱딱한 코코넛이 아닐까. 누가 이 먹기 까다로운 열매를 깨어주랴.